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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달 Nov 23. 2024

나를 키운 건 8할이 전남편이었다.

전남편을 변호합니다.

브런치스토리 작가 신청을 할 때 앞으로 쓸 글들의 대략의 목차와 계획을 요구했다.

나의 애초 계획은 역순행적 구성이었다.

첫 번째 브런치북에서 현재의 이혼 이야기를 한다.

두 번째 브런치북에서 과거로 돌아간다. 첫 번째, 두 번째 외도로 망가진 나의 결혼 생활 이야기를 한다.

세 번째 브런치북에서는 더 과거를 회상하며 전남편과 나의 불같은 사랑이야기와 신혼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세 번째 브런치스토리에서, 독자들의 배신을 때린다.

독자들은 첫 번째 두 번째 스토리를 읽으며 전남편을 욕할 것이다.

그런데.

웬걸.

이 여자도 보통이 아니네?

이 반전에서 오는 배신감!

그것을 노렸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망했다.

전남편은 신랄한 나의 브런치북을 중단케 했고, 나는 무섭고 끔찍해서 그만두고 말았다.

그래도, 이 브런치북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녹여내어,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으니.

계획이란 늘 수정되기 마련이니.

이제 슬슬 이 브런치스토리가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서 당초 계획을 이어가 보련다.


배신감에 얻어맞을 준비, 되셨는지요?




나는 자라지 못한 어린이인 채 결혼을 했다.


1. 가까운 사람에게기분이 태도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 기분이란.

행복함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물론 짜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포함되었다.

밖에서는 천사처럼 웃고, 집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울어버리는 사람이었다.


보통 나의 짜증은 해 내야 하는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오는 상황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나의 느린 생각과 행동이

잘하고 싶은 욕심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나이 마흔에야 알았다.


신혼 초 나는 교사 임용 준비 중인 고시생이었다.

결혼 생활도 공부도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은 그러지 못하는 상황과 맞물려 나의 기분을 궁지로 몰아갔다.


더하여해야 할 공부가 늘 나를 쫓아오던 고시생에게 잦은 시댁 행사 참여는 부담이었고,

그것은 늘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전남편은 내가 변했다 생각했고,

나는 전남편이 나를 이해 못 해준다 생각했다.


한 번은 시댁 쪽 친척 누나 아기의 돌잔치가 근처에서 있었고,

나는 공부를 해야 하니 행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전남편은 결혼하고 처음 있는 행사인데 안 가겠다는 나를 못마땅해했지만,

나는 또 울면서 고집을 부렸고,

결국 전남편 혼자 행사에 다녀왔다.

다녀왔는데 함께 왔다.

시댁 쪽 이모님들이 같이 왔다. 

밤 8시가 훌쩍 넘은 시이었다.

나는 떡진 머리에 트레이닝 차림.

집에는 내놓을 음식도 마땅치 않았다.

갑자기 가는 것이니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정말 매실차 정도만 내놓을 수 있었는데, 오셔서는 꺼내어진 냄비와 그릇들을 보시며 이모님께서

"그래도 뭐라도 해 먹고 사는갑다이~ 잘하고 사는 구만~" 하셨다.

칭찬을 하셨는데도, 나는 그것이 고까웠다.

이미 내 마음은 비뚫어져 있었다.

그날 나는 시댁 식구들 험담을 했다.

서운하다고도 했다.

전남편에게.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고까웠어도,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언젠가 전남편은 공부하다 짜증 내고, 집안일로 짜증 내는 내게

자신이 감정 쓰레기통이냐며 분통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그랬다.

전남편이 그렇게 느낄 만큼 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전남편에게 쏟아내었다.

나는 전남편이 당연히 내 곁에 있을 줄만 알았다.

시댁 식구들 험담을 늘어놓아도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다.

집에서 짜증 내고 울어도 늘 내 곁에 있어주었던 부모님처럼,

변함없이 그대로 있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전남편은 상처받았다.


결혼하던 해 임용에 합격했고,

우리에게는 동글이가 생겼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예민한 파워 J는 시부모님의 잦은 방문이 힘들었고,

효자인 전남편은 얼굴을 찡그린 채 싫은 티를 내는 며느리 눈치 보는 시어머니가 마음에 쓰였을 것이다.

전남편은 내게 실망했다.


지금이었다면, 많이 달랐을 것 같다.

조금 더 유한 언어로,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했을 것이다.

밤늦게 찾아오신 시댁 쪽 어르신들께 떡진 머리 정도 보여드리는 것이 무엇이 대수랴.

"아유, 제가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드릴 게 이것밖에 없어서 죄송해요~ 다음에 오시면 맛있는 것 해 드릴게요~" 하며 웃었을 것이다.

그런다고 다음에 또 오실 분들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공부 때문에 짜증이 날 땐, "나 공부가 잘 안 돼서 너무 힘들어. 잉잉 ㅠ.ㅠ"하고 전남편에게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달콤한 간식을 손에 쥐어주며, 쉬엄쉬엄하라고 토닥여주었을 전남편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집안일을 하지 않는 전남편에게 속상한 날에는 전남편이 좋아하는 것으로 거래를 했을 것이다.

설거지옥, 빨래지옥, 분리수거지옥, 음쓰지옥보다 나은 거래였을 것이다.


기분이 태도가 되는 어른이 얼마나 미성숙한 어른인지.

전남편 덕에 알았다.



2. 생각의 전환이 느린 사람이었다.


나는 천천히 생각하고 신중하게 결정하는 사람이다.

전남편은 생각도 빠르고, 계산도 빠르고, 결정도 빠른 사람이다.


나는 계획 하에 상황이 어느 정도 눈에 보여야 안심하고, 미리미리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다.

전남편상황이 어떻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때그때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다.


전남편은 계획형이지만 생각과 결정이 느린 나를 답답해했고,

나는 닥쳐서 일을 하는 전남편을 답답해했으며 즉흥적인 전남편을 버거워했다.


한 번은 동글이가 아기일 때 여행을 갔는데, 아기띠를 집에 두고 와서 계속 안고 다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전남편은 "그냥 내가 안고 다닐게, 괜찮아." 했는데,

나는 아기띠를 왜 집에 두고 왔는지, 나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그날 여행의 모든 일정에서 짜증을 냈다.

동글이를 안고 다니는 전남편에게 미안함과, 나의 실수를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이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이 일이 두고두고 후회되는데,

지금이었다면 "앗, 아기띠를 두고 왔네. 어쩔 수 없다. 미안해. 오빠가 안고 다니다 오빠 힘들면 내가 안고 다녀도 괜찮아. ^^" 했을 것이다.

별일 아닌데, 나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그것이 끼칠 여러 영향미안해지는 상황견딜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살다 보니,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이란. 없는 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전남편은 연애 시절부터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생각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사람마다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남편의 '같음 추구'가 힘들었지만, 나는 전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고, 전남편과 같아지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 생각의 차이가 있었고,

미성숙하기 짝이 없는 나는 내 생각이 느리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철없이'원래 내가 그래.'를 시전 했으며,

전남편은 '원래 그런 게 어딨냐, 좋은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 너무 우기지만 말고 생각을 해라. 너는 생각이 부족하다. 내 생각이 맞으니 내 의견을 따라라.'였다.

나는 충분히 생각하지 못하고 전남편의 결정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랐는데, 그게 또 분하고 억울했던 나였다.


이렇게 속도가 너무나 다른 둘이 만나,

그 차이를 인정할 줄 모르고 살았다.


속도의 차이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그러나 '원래 그래'를 시전 하는 것보다 생각의 전환을 하여  발전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전남편 덕에 배웠다.


3. 전남편의 수고를 정해주지 않아 외롭게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전남편은 나의 인정을 원했다.


전남편은 전부터 먹고 남은 콜라캔을 상 위에 그대로 두다. 그러면 '집안일은 여자가' 마인드의 전시어머니께서는 군말 없이 치워주셨다.

'남녀평등'을 외치는 내게 그것은 너무나 짜증 나는 상황이었고, 계속 그래야만 하는 나의 앞날이 짜증 났다.


엄마가 요리를 하면 아빠가 설거지를 했고,

내 교복을 다려주는 것은 아빠 몫이었고,

엄마가 청소를 하면, 아빠가 빨래를 하던 집에서 자란 내게 그것은 어마어마한 시련이었다.


전남편이 나를 위해 그 힘든 운전을 하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고,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했다.

그 수고로움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동글이를 낳고 나의 모든 신경은 동글이에게 가 있었다.

동글이는 예민한 엄마를 닮아 여러 감각들이 예민했고,

자꾸만 밤에 깨서 안아줘야만 자는 통에 나는 2년 가까이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잠귀가 밝은 나와 달리 전남편은 동글이가 울어도 잘 잤고,

부모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나,

나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솔직히 억울했다.

그래도 주말에는 나 대신 동글이를 안고 잠이 들었던 전남편의 수고로움을 감사해하지 못했다.


부부관계를 좋아하는 전남편은 수면 부족에 시달려 부부관계에 관심이 없는 내게 자주 서운해했고, 자꾸만 부부관계를 재촉했다.

그러나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 피곤했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는 전남편에게 서운해졌다.

동글이가 낮잠을 자는 틈에 부부관계를 했고, 전남편도 느꼈지만 내게 그것은 숙제였다.

나는 울면서 얘기했다.

내가 관계만을 위한 직업여성이 된 듯한 기분이라고.

그렇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전남편을 무시한 게 아니었다.

나의 서운함을 토로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 무렵, 장나라 손호준 주연의 '고백부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었고,

손호준이 자기 가족을 위해 원하지 않는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전남편은 저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 했으며,

나는 "오빠, 내가 공무원이니까 오빠가 그런 생각을 하지."라고 했다.


첫 번째 외도 후, 외도의 이유에 대해 얘기하던 중.

전남편은 그때 솔직히 내 말이 심했다고 생각했단다.

내가 공무원인 게 유세냐며.

당시 전남편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꿈을 접고, 학교에외판원 취급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취급을 하는 교사가 나쁜 것이지, 모든 교사가 그렇지는 않다고 주장했으나,

전남편은 그런 일이 자존심 상한 듯했다.


그러니까 전남편은 내게 부부관계로도, 직업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했다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일정 부분 내게도 책임이 있다.

내가 아무리 피곤했어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부부관계 개선을 위해 조금 더 노력했어야 했다.

그것은 부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전남편에게 직업적인 자격지심이 있었다고 느꼈다면, 아니 그렇지 않았더라도

전남편의 커리어를 인정해 주고, 그의 직업인으로서의 프로페셔널함을 칭찬해 주고, 힘들었겠다 고생했다 등등의 토닥임을 해주었어야 했다.

그것이 현명한 아내의 자세였다.


그리하여 나는 전남편 덕에

타인의 노력을 인정하는 미덕을 배웠다.


4. 전남편의 바람을 용인해 주었다.


1,2,3번과 같은 이유로 전남편은 내게 실망했고, 몸과 마음이 외로워졌다.

그리고 이를 채워줄 수 있는 1번 상간녀를 만났다.


전남편이 내게 얼마나 큰 실망을 했고, 얼마나 외로웠을지 이해한다.

물론, 그렇다고 전남편의 외도가 합리화되어서는 안 된다.

부부간의 문제는 부부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부부 안에서 해결이 안 된다면, 바람을 피기 전에, 내게 헤어짐을 얘기했어야 했다.

물론, 전남편은 동글이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해도 해도 안 되는 마음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1번 상간녀가 나타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 생각하고, 내게 이혼을 얘기했을 것이다.


나는 전남편의 첫 번째 외도 이후 나의 미성숙한 부분에 대해 많이 반성했으며,

성숙한 어른이 되려 노력했다.


그런데 1번 상간녀가 다시 나타다.

전남편은 완벽히 나를 속이며 1번 상간녀를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단서들을 흘리고 다녔고,

단서들을 주워 퍼즐을 맞추고,

전남편의 뻔뻔한 거짓말 앞에,

얼토당토않게 전남편의 바람을 용인해 주었다.

용인한 이유는 이혼이 두려웠다.

그리고 아직 전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내가 이혼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남편의 사랑 따위 필요 없다는 당당한 마음이 첫 번째 외도 때도, 두 번째 외도 때도 있었다면,

그래서 전남편의 바람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외도 때 나는, 제발 이혼만은 하지 말아 달라며, 상간녀 소송을 취하했다.

상간녀 소송 취하.

그것이 전남편이 나와 이혼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정말로 이혼을 하지 않으려면 상간녀 소송을 끝까지 해야 했다.

전남편에게 "그래, 상간녀 소송도 하고, 우리 이혼도 하고, 너는 내게 위자료도 줘야 해."라고 큰소리쳤어야 했다.

그때가 아니었더라면,

두 번째 외도 때라도 했어야 했다.

"다시 안 만난다고 했는데,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하겠다고 각서까지 썼는데, 이렇게 나를, 동글이를 배신하고 다시 만나는 것이냐, 그런 뻔뻔한 거짓말 따위 집어치워라. 이혼하자!"

강하게 나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 바람을 피우면 이렇게 망하는 거구나. 다시는 바람피우지 말아야지. 반성하고 아내에게 동글이에게 잘해야지."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무서웠다.

그 모든 것이 무서웠다.

쫄보였다.


전남편 덕에 배웠다.

어떤 이유에서든 외도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무서워서 피하면 더 큰일이 되어 돌아온 다는 것을.



4번의 반성은

1,2,3번에서 내가 잘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요즈음의 나는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게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어쩌면 내가 조금 더 현명했다면 다른 미래가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미드나잇라이브러리'에서처럼 다른 선택을 한 내가 이 우주 어딘가에서는

아직 전남편과 동글이와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나를 충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위의 여러 반성들 속에서 여전히 나를 변명하고 있고, 여전히 전남편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여전히 내가 나쁜 사람이 되기는 싫은 모양이다.


그리고,

나를 반성하는 동시에 전남편을 변호하는 글을 쓰자니,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  글을 쓰지도, 다 써 놓은 글을 퇴고하지도 못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연재일에 맞추지 못할 것만 같아,

불안하다.


여전히 나는 미성숙한 어른이다.

그래도 그나마 고무적인 것은, 스스로 미성숙한 어른이라는 것을 인지하였고,

조금씩 성숙한 어른이 되려 열린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어쩌면,

정말로,

전남편을 만나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미성숙한 어른인 것을 모르는 채로,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기분이 태도가 되게 날카롭게 말하고 짜증을 부리는,

별로인 어른이 되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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