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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Nov 04. 2023

같은 향기가 나는 사람

2. 적을 위하여

살다 보면 같은 향기가 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옷차림에서 눈빛에서 그이의 핸드로션에서 핸드폰케이스에서 노래 플레이리스트에서 요새 읽는다는 책 제목에서 말투에서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법처럼 마음이 옆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받는다.

남녀를 불문하고 나이와 상관없이 그런 이를 만나게 되면 나와 더 같은 점은 무엇인지 궁금해지고 조금 다른 점을 발견하면 그 속내에는 나와 같은 의도가 있진 않을까 더욱 공감할 거리를 찾게 되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늘 두렵고 어렵지만, 취향이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쁨을 느끼게 된다.


취향이란 것은 어쩌면 한 사람의 수많은 경험과 결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면이라 우리 모두가 나만의 취향에 힘을 들이는 것이 아닐까. 옛말에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 사람이 드러낸 여러 취향을 종합해 보면 얼추 그이의 현재 삶의 태도를 알 수 있는 것 같다.

취향도 성격처럼 어떤 부분은 계속해서 변하지만, 고유의 알맹이는 유지되기도 한다. 보편적으로 나이와 시기를 타는 면도 있고, 개인의 경험에 따라 바뀌는 부분도 있다.

나는 초등학생쯤부터 주체적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세계명작전집에 손을 댄 것이 시작이었다. 읽는 것 그 자체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읽어냈다는 것만이 내 삶에 쓰여 있을 뿐이다.

그 이후로는 관심이 가는 책 위주로 읽어 먹어버렸다. 책을 좋아했다기보다는 타고나기를 읽고 쓰는 것에 큰 부담이 없는 성격이었다. 입이 심심할 때 과자를 집어먹듯이 그저 책장을 넘기는 것이 나에겐 가벼운 생산성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에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남학생은 책을 좋아했다. 빡빡머리에 늘 뚱한 얼굴을 한 남자아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그 녀석과 처음 같은 반이 되었는데 여학생들을 못살게 구는 꼴이 얄미워서 저런 애는 싫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아이였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교무실로 갔다. 선생님은 자리에 계시지 않았지만, 책상 위에 반듯하게 놓인 A4용지다발이 보였다. 겉표지에는 제목, 부제목, 이름과 소속학급이 적혀있었고 그 얄미운 녀석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슬쩍 종이를 들춰보자 지난번 수업에 숙제를 안 해온 벌로 적어야 했던 깜지였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찼지만 곧바로 눈썹이 확 올라가도록 눈이 커져버렸다. 종이 모서리에는 악필로 쓴 쪽 번호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작은 쪽지에는 선생님이 지시하신 깜지의 양을 다 채우지 못한 이유가 상세히 적혀있었다.

나는 그 단정함에 어떤 향기를 맡은 것 같았다. 까불이 중학생이 무슨 대학생 리포트처럼 깜지를 제출하다니.

그리고 교실에 돌아와 그 녀석을 지켜보았는데 그 아이는 이름 모를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 뒤로 3학년이 되어서도 그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지만 중학교 졸업식날까지 단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갑자기 마음이 너무 쑥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그 녀석이 읽는 책 제목을 몰래 훔쳐보고는 따라 읽으며 일 년을 보냈다.

그 녀석도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따라 책을 읽던 속셈이었고 나는 또 그 녀석을 따라 같은 책을 읽었다. 같은 반에서 세 명이 순서대로 같은 책을 읽는 웃기는 광경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눈치채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남자아이를 좋아했다기보다는 그 녀석의 취향을 좋아했던 게 아닐까 싶다.

어린 나이였고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다 보니 아주 조금 일치하는 취향에 마음이 움직여서 결국 그 사람까지 좋아하게 된 것이다.

취향이란 것이 얼마나 순수하고 위험한 것인지 나는 그 이후로도 그 녀석과 닮은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어른이 되었다.

물론 지금의 나였다면 더 많은 부분들을 고려하면서 최종적으로는 빨리 마음을 접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여전히 어른이 되어서도 나와 같은 향기가 나는 사람을 만나면 비교적 쉽게 마음이 열렸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본능적인 거라 막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단연코 취향에 속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취향이 같은 것과 감정이 같은 것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빨리 인지해야 한다.

회사에서 나와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우리가 자매처럼 닮았다고 했다. 그녀와 나는 옷 입는 취향이나 태도, 플레이리스트 등 공통점이 많았다. 또한 겉모습은 마냥 여성스러워 보이지만 은근히 대찬 면이 있고 무엇인가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다.

어느 날은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가방을 그녀가 메고 왔고, 또 어느 날은 나를 보며 그 옷 나도 집에 있다며 크게 웃는 날도 있었다. 삶이나 여행에 대한 생각도 비슷했고 우리는 참 취향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향기가 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편안함과 설렘을 동시에 느낀다. 심지어 든든함까지 느낀다고 하면 누군가는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진심이기에 똑바로 말할 수 있다.


그녀와 나는 다른 부서였기 때문에 자주 많은 대화를 할 순 없었지만, 조금씩 더 가까워지게 되며 둘이서만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다양한 민속주를 파는 예쁜 술집이었는데, 우리는 맥주 한 병을 나눠먹을 뿐 술도 음식도 배불리 먹을 생각이 없었다. 소식을 하는 것까지 닮아있던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도 그녀는 남자친구와의 잦은 다툼으로 영 기운이 없는 상태였다.

"성격이 안 맞는 거 같아요. 남자친구가 하는 말이 저한테는 상처가 되고, 제가 하는 행동이 그 사람에게는 화가 날 일이라고 하네요."

깊은 사정은 모르지만 누가 들어도 둘은 정말 성격이 잘 맞지 않는 커플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미 지나치게 고민을 하고 있을 텐데 내가 더 좋은 해결책을 턱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처음부터 맞지 않는다고 느껴졌어요? 아니면 처음에는 잘 맞는 것 같았어요?"

나는 이럴 때 상대에게 질문을 많이 한다.

점층적으로 문제의 핵으로 다가가는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결국에는 내면에 있던 답을 스스로가 말하게 되는 방식은 그 어떤 가르침이나 강요보다 큰 울림을 느끼게 한다.

"처음에는 다른 게 좋았어요. 저랑 다른 그 성격이 저에게는 멋지다고 느껴지고 자극이 돼서요. 제 취향이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때는 좋았어요."

그녀는 내 속셈을 모르고 그저 힘없이 대답했다. 이때 포기하면 안 된다. 불편하진 않게, 하지만 좀 더 파고들어야 한다.


"다른 점을 좋아하는 것도 취향이긴 하죠. 저도 그럴 때 있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그 다른 점이 힘들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거예요?"

"네. 저는 다른 점을 멋있다고 느꼈는데, 그 사람은 자기를 무시한다고 느꼈나 봐요."

"주임님은요? 주임님도 그렇게 느꼈을 때가 있어요?"

그녀는 잠시 대답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그녀라면 이쯤에 지금 내가 생각하는 답과 비슷한 답을 내놓을 거라고 예상했다.

"저는 지하철에서 다리가 아파서 그냥 앉아있었거든요? 그 사람이 갑자기 짜증을 냈어요. 제가 먼저 짜증을 냈다면서요.. 저는 내심 서운했지만 티를 안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제 무던함이 본인과 비슷해서 좋다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저도 우리의 말투가 닮았다고 생각한 적 있거든요. 그 사람은 그 순간에도 제가 무던하길 바랐던 걸까요."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 예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정확한 길도 해결책도 모른다. 그녀의 일이기에 내가 답을 낼 수 도 없지만, 그저 그녀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돕고 싶을 뿐이었다.


"다른 점도 같은 점도 취향이 맞아서 서로 좋았다는 건데, 그럼 싸운 이유는 뭘까요?"

"취향은 같았지만 감정은 다를 수 있으니까.

맞네요. 감정은 또 전혀 다른 건데, 우리는 취향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예측에서 벗어나면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했네요.

내 취향일 뿐이고 내가 생각한 우리의 취향일 뿐인데."

나와 비슷한 답을 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녀가 나와 취향이 비슷하니까라는 생각에서 온 오판이었다.

그녀의 생각이 훨씬 멋진 답이었다. 나는 사실 배려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어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조금은 경쾌하게 대답했다.

"선택이지 않을까요? 취향과 감정을 분리해서 생각해 낸 사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도 또 길을 찾아나갈 거예요. 취향도 감정도 원하는 대로 하는 거잖아요. 이번에도 원하는 대로 선택해서 어떻게든 좋은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어요.

제 생각에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느껴진다면, 사실 원하지만 힘들어서 그런 거 같아요.

지금 주임님 엄청 멋있어요. 주임님이 지금 겪고 있는 힘든 감정과 별개로 또 제 취향이시네요."



살아갈수록 나와 같은 향기가 나는 사람보다 나와 다른 향기가 나는 사람들을 훨씬 많이 만나게 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나와 취향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이 자주 나를 여려지게 하고 성질이 나게 한다.

그래도 크게 숨을 한 번 고르고 그 속을 조심스럽게 헤집어보면 막상 그들과 감정이 일치하는 순간이 꽤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결국 타인에게 내 감정을 충분히 수용받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느끼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취향에 의존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동안 내가 내비쳤던 감정과 선택들이 어쩌면 스스로를 더욱 가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뒤늦게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척을 지고 끝을 맺었던 인연들 중 한 두 명쯤은 사실 취향이 달랐을 뿐이었고, 마냥 퍼주다가 내가 당했다고 느꼈던 결말의 대부분은 감정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던 스스로가 만든 비극일 때가 많았다.


사랑하는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만들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적으로 둘 정도로 미워하지 않는 것이 결국에는 사랑하는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다면, 취향에 속지 않아야 한다.

향기에 매혹되어 이 꽃만이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광활한 들판 위에 피어있는 천송이의 꽃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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