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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Nov 02. 2023

뻔한 데이트가 인기 있는 이유

1. 사랑을 위하여

내가 생각하는 데이트라 함은 식사와 차 한잔 그리고 특정 장소를 구경하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좀 더 나아가면 어떠한 활동을 함께 하는 것까지 포함되는데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보았을 때 공통점은 유희가 아닐지 짐작해 본다.

유희라는 것은 큰 카테고리 안에서도 다양하게 나누어져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즐거움 그 자체이다.


사람의 성격만큼이나 데이트의 종류도 다양하다. 분명한 것은 유희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가끔 봉사활동이나 과격한 운동을 함께 하는 커플을 본다. 그것 또한 그들에게는 기쁨의 영역이기에 일종의 데이트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하게 되면, 연인 때와는 또 다르게 단순 유희를 위한 동행보다는 해야 해서 하는 일을 함께 하는 와중에 기쁨을 찾아내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남편은 연애 시절에 핫한 카페나 맛집을 가고 싶어 했다. 줄을 조금 서더라도 입소문 난 그곳에서 사진도 찍고 시그니처 메뉴를 먹어보는 것이 재밌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반대로 나는 오래 기다려야 하고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다 보니 처음에는 그를 따라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즐거웠지만 점차 본능적인 불편함이 더 커져갔다.

번잡한 곳을 싫어하는 나는 갈수록 일방적으로 그런 장소를 거부했고, 그러다 보니 우리는 동네식당이나 가까운 카페를 잠시 들르는 정도로 데이트의 스타일이 변화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그는 내게 놀이동산 데이트도 여러 번 제안했지만, 나는 기구를 몇 개 타지도 못하고 걷다 지칠 스스로를 상상해 보고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쯤 되면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의 기쁨을 뺏은 것은 아닌지 내심 미안했지만, 나는 복잡한 곳에서 신체적 에너지를 빨리 빼앗기는 편이다. 또한 익숙하지 않은 것 앞에 서면 싫은 것이 아니라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즉 나는 남들이 하는 데이트가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제대로 놀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내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그까지 삼삼한 인생의 열차를 타고 남은 여생을 달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작은 죄책감이 밀려오지만 우리에겐 한 줄기 희망 같은 장소가 있다.

바로 맛집으로 유명한 평양냉면집이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그곳에 가서 거금을 쓰고 온다. 그날만큼은 나 또한 전투적이라 간혹 한 그릇을 다 먹고 나오는 날도 있을 정도로 진심이어서 남편에게는 유일한 나들이 같이 느껴질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부부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꾸준히 맛집이나 여행을 다닌다. 물론 빈도면에서는 결혼 전보다 확연히 줄어들었겠지만 말 그대로 꾸준히는 데이트를 해왔다. 분명 그 부부가 심하게 다투는 모습도 보았고,  누군가처럼 배우자의 험담을 한 적도 있었지만 어쩜 그렇게 꾸준히 데이트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흔히들 데이트하기 딱 좋다고 표현하는 아주 화장한 날에 그녀를 만났고 나는 물어보았다.

"저는 성향도 그렇고 결혼하고 나니까 딱히 큰 이유가 없어도 바빠져서 데이트를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항상 예쁘게 데이트하시는 모습이 참 부러워요."

그녀는 나와 비슷한 성향이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냥 따라다니는 거예요. 수용하고 따라다니다가 가끔은 제가 의견을 내기도 하고. 애써서 유난스럽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이제는 그냥 당연해요."

내가 이해한 바로 그녀의 말은 데이트를 습관화했다고 한다.

데이트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드는 시점이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히 온다. 평소보다 공들여 예쁘게 꾸미고 꼭 먼 곳을 가야 하고 그랬던 정성스러운 마음보다는 무리하고 싶지 않고 편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려는 순간이 찾아올 때, 미리 들여둔 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데이트에 목숨을 걸어야 할까. 어렴풋이 알 것도 같으면서 정확히 정의 내리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생각해 보니, 나는 완벽주의 기질 때문에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재미없을 수 도 있고, 좀 힘들 수 도 있는데 그것이 뻔히 예상되니 굳이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건 안돼. 그건 나중에.' 버릇이 아니라 '그래 하자. 그래 가자.' 버릇을 들였다면 우리 두 사람 모두가 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 남자 동료 한 명이 데이트를 간다고 했다.

언제 연애를 시작했는지 몰랐는데 그는 어리숙한 얼굴로 고민스러워하고 있었다. 상대가 고백을 원하는 것 같은데 오늘 가서 그냥 말할까 싶다며 자칫 퉁명스러워 보일 수 있게 말했지만, 내게서 어떤 말이든 대답을 듣고 싶은 눈치였다.

회사에서 그의 이미지는 일은 잘하지만 연애 쪽으로는 영 센스 있는 남자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일단 몇 가지 질문을 통해 현재 상황부터 점검해야겠다고 했다.

그들은 총 세 번의 데이트를 했고 파스타와 커피, 영화관, 마지막으로는 한강 도시락 데이트를 했다고 대답했다.

대부분의 데이트가 비슷하다고 생각해 오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나 진부할 수가! 잘했어!

나는 그에게 진부한 그 선택을 칭찬해 주었다. 아주 오래되고 뻔한 방식이지만 남녀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한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함께 살짝 붙어서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오늘 고백을 할 작정이라면,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꽃다발을 사서 만나라고 말해주었다.

또 곧이곧대로 꽃집에 가서 꽃다발 하나 달라고만 하지 말고, 당신이 그녀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색이나 느낌을 꼭 함께 말해야 한다고 말해주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좋았어!라고 외쳤다.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생각했다. 옆에서 꽃은 너무 진부하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고, 한번 사주면 계속 사줘야 한다는 말림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커플은 약속장소에서 만나서 꽃다발을 건네주고 곧장 식사를 하고 카페를 갔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남는다면 한적한 곳을 걷는다거나 오히려 북적이는 곳으로 가서 소소한 액세서리를 구경할 수도 있겠다.

별빛만 남은 까만 밤에는 예쁜 감성 술집에 가서 세상에 둘만 있는 듯 서로에게 취하기도 하겠지.

취기에 용기를 내 주말에는 멀리 있는 곳으로 가보자며 드라이브 계획을 짤지도 모르겠다.

뻔하다 뻔해. 정말 즐거울 거야.

그 속에 남녀는 과연 남들과 똑같은 데이트를 한다는 것이 신경이 쓰일까? 평소에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라 기분이 나쁠까?

그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즐거울 뿐인데 내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마음이 살짝은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과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흔한 결심을 해왔다. 이번 봄에는 꼭 봄놀이 가자. 이번 여름에는 꼭 수영하러 가자. 이번 가을에는 꼭. 이번 겨울에는 꼭.

연애기간에는 많은 일을 겪으며 갈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까 남들 다 하는 뻔한 데이트를 덜 한다는 사실을 평소에는 잊고 살게 된다. 매일 보는 사이에 무엇이든 함께 하는 것이 즐겁다 보니 쉬는 날에 애써서 각 잡힌 데이트를 잘 안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이 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도 될까 불쑥 노파심이 올라오면, 마음이 허해지고 가슴이 콕콕 찔린다.

매번 기회가 왔을 때는 '뻔한 데이트 나중에 하지 뭐.' 소중한 줄 모르고 넘겨왔지만, 그 외면이 잔뜩 쌓이자 지나친 시간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미련이 찾아왔다.


우리 집은 창밖의 뷰가 참 좋다. 바로 앞에 작은 공원이 있고 2층이다 보니 나무가 팔만 뻗으면 닿을 듯 높이가 딱 맞아서 매 계절마다 멋진 풍경 액자가 걸린 것만 같다.

얼마 전까지 푸릇하고 풍성한 잎사귀 사이로 새들이 앉아서 노니는 것을 구경했었는데, 어느새 과일이 익듯 이파리들이 하나씩 물들었다. 해가 밝은 낮에는 빨간색 노란색 단풍이 하나 둘 떨어지는 것을 혼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진을 찍어두기도 했고 괜히 창문을 열어 손을 뻗어보기도 했다.

예쁘게 차려입고 그와 단풍놀이를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별 이유 없이 미루게 되었다. 평일에 쌓은 피로를 핑계대기도 하고, 그날의 기분뒤에 숨기도 했다.


마트를 가기로 한 날, 멀지 않은 거리지만 구매한 짐이 무거울까 봐 차키를 챙겨서 나왔다.

그가 오랜만에 쉬는 날이었고, 피로가 잔뜩 쌓였기 때문에 오전 시간은 꼼짝없이 누워서 쉬기 위한 빈둥거림으로 채운 후였다. 가을의 날씨는 마치 사람의 마음처럼 좋았다 나빴다를 빠르게 반복한다.

어제는 추웠기 때문에 괜히 무거운 기분으로 옷을 껴입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상도 못한 포근한 라떼 같은 날씨에 둘 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늘 생각하고 있다면 찰나의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기회임을 눈치챌 수 있나 보다. 나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끌며 집 뒤에 작은 공원으로 뛰어갔다.

"우리 단풍놀이 하자! 예쁘게 사진 찍어줘!"

모자와 안경을 푹 눌러쓴 나는 낡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예쁘려고 맞춰 입은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입은 꼴이라 전체적인 옷차림이 매우 부조화스러웠지만 나는 나무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며 발랄한 포즈를 취했다.

사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단번에 신이 나서 사진을 요리조리 찍어대더니 같이 셀카를 찍자며 머리를 매만졌다. 둘 다 이 전형적인 단풍 구경을 원해왔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빛 좋은 곳을 골라 장소를 옮겨가며 그 작은 공원에서 얼마나 사진을 찍어댔는지 강아지와 산책하던 사람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세상 안에서 둘 밖에 안 보이는 게 데이트이거늘. 그 시선이 신경 쓰일 리가.

"우리 마트도 걸어서 다녀올까? 이게 바로 단풍 산책 마트 데이트야!"

"좋아! 우리가 드디어 단풍놀이를 한다! 야호!"


손을 꼭 잡았다가 팔짱을 꼈다가 몸이 베베 꼬이는 느낌이 들정도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졌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조금만 더 일찍 이 뻔한 데이트를 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단풍나무가 많은 길만 골라 걸어 보았다.

곧장 갔다면 마트까지 20분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그 길을 두 배의 시간은 걸려서 걸었고 행복해하는 그를 보며 또 한 번 깨달음을 얻었다.


내 성향을 핑계로 미루기만 했던 이 진부한 표현을 사실은 나 스스로도 원하고 있었구나.

결국 둘 다 행복해진다는 걸 내 마음 한편으로는 알아서, 망설이는 동안에도 그렇게 섭섭하고 내심 원했었던 거구나.

올 겨울 크리스마스에는 그가 보고 싶어 했지만 멀다고 포기했던 커다란 트리 장식을 같이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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