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같은 기숙사를 썼던 선배 한 명이 실연을 당했다. 당시는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가 상영된 지 몇 년이 지난 후였는데, 선배가 영화를 보고는 꽤나 감동을 받았나 보다. 그런데 이 선배가 인생의 쓴잔을 마시고는 서울에서부터 부산까지 달리기로 갔다 오겠다는 정신 나간 계획을 세우고, 후배 한 명과 같이 뛰기로 계획을 세웠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그냥 뛰기로 마음먹었단다. 후에 얘기를 들어 보니, 같이 뛰기로 한 후배가 배신을 하는 바람에 혼자서 부산까지 달려갔다 왔다고.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좀 다른 측면의 이야기긴 하지만.
이 선배를 만날 때면 항상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회상하곤 한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다.
7월 18일 목요일.무더운 날씨지만 내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위대한 여정에 오른 듯, 가슴은 온통 기대와 설렘으로 쿵쾅거리고, 몸은 날개를 단 것처럼 가볍기만 하다.
지난 반년, 역사 공부에만 매달리면서 어렴풋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책만 볼게 아니라 실제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봐야 진짜 아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와~! 나도 이렇게 두루 돌아다니면서 문화유산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고, 나만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
그래서 국내 편 10권을 다 읽고, 답사 지도를 전부 사진으로 찍고 인쇄하여 여행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시작으로 200여 곳에 이르는 장소를 일일이 연결하고, 하루의 코스와 일정을 짰다.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여독에 지친 몸을 달래줄 사우나와 24시간 찜질방을 검색하고, 잘 곳이 마땅치 않으면 텐트를 치고 자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고대 목조건축물의 구조와 명칭, 석탑과 승탑 같은 고대 구조물에 대한 공부도 병행하였다.
여행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은 소위 ‘몸빼’로 불리는 왜 바지와 샌들이다. 원래 내가 좋아하는 바지이기도 했고, 시원하고 편한 데다 빨래와 건조가 용이해서 여름에는 이것을 능가할 만한 옷을 찾기 어렵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주머니도 헐렁하여 소지품들이 빠지기 쉽다는 것인데,
이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몸빼가 어떤 참사를 가져올지.
선배가 머물고 있는 안면도에 찾아간다는 약속도 있었고 해서, 여행의 시작은 태안으로 잡았다. 백제문화가 출발점이다. 태안의 마애불을 시작으로 신두리 해안사구, 천리포 수목원을 거쳐 안면도에 도착하는 것이 첫날의 동선이다.
태안 마애삼존불을 보니, 서산 마애삼존불과 비슷한 방식으로 조각한 것이 보인다. 불상은 위쪽은 튀어나고, 아래로 갈수록 안쪽으로 들어가는 비스듬한 벽면에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머리와 몸통 쪽은 많이 파내고, 다리 쪽은 적게 파내어 불상을 새긴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유난히 위쪽 바위가 튀어나와 있어, 비가 와도 불상이 비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불상을 새긴 사람의 마음가짐이 여기에 드러난 듯하다. 성스럽고 존귀한 대상이 비에 젖어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으면 짖꿎게도 꼭 딴죽을 걸고 싶어 진다.
"그런데 정말 비에 안 맞을까?"
태안 마애삼존불. 마애불을 보면 비스듬한 바위벽에 불상을 새기고, 얼굴과 몸통 쪽을 많이 파낸 것이 확연히 보인다.
서산 마애불 역시 비스듬한 벽면에 조각되었고, 머리와 몸통은 많이, 다리 쪽은 적게 파냈다. 불상의 머리 광배에 원형으로 연꽃과 불꽃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백제 특유의 양식이다. '백제의 미소'라는 명성에 걸맞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첫날이라 열정이 넘쳤는지, 신두리 해안사구에서 많이 걸었다. 홍보관부터 시작해서 람사르 습지, 소나무숲, 모래 언덕, 해안까지 다 돌아보느라 몇 시간을 걸어 다녔다. 덕분에 많이 둘러보기는 했지만, 샌들을 신고 걷다 보니 발에 무리가 간다. 하지만 자연환경이 수십, 수만 년에 걸쳐 만들어지는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인간은 수만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자연의 노력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파괴적인 힘도, 자연의 작품을 보전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창조적인 힘도 함께 갖추고 있다.
신두리 사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천리포 수목원은 갈 수 없었다. 만리포 해수욕장에 잠시 들른 뒤 안면도로 길을 잡았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선배가 난감해했다. 언제나 후배를 살뜰히 챙겨주는 선배인지라, 잘 준비하여 대접하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일찍 도착했던 것이다. 부랴부랴 돼지 목살과 쌈채, 특제 소스를 준비해서 푸짐하게 먹고 쉬었다. 물론 대학 시절 서울부터 부산까지 뛰어갔다 온 이야기는 빼놓지 않았다.
여행 계획을 선배한테 브리핑해 주었더니, 다 듣고 난 선배가 나에게 말한다.
"너도 참 별난 놈이다."
그러면 나도 지지 않고 말한다.
"어디 선배만 하겠수."
푸짐하게 먹고 편히 쉬는 것은 오늘로써 땡이다. 누릴 수 있을 때 후회 없이 누리자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해안 사구
태안 신두리 해안 사구는 대략 길이 3km, 폭 1km의 큰 규모를 자랑하는 모래 언덕으로, 지형의 다양성과 자연 생태가 잘 보전되어 있다.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