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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담 Dec 03. 2023

공유기가 살아났다!

불사조

공유기가 12시간 만에 살아났다. 전에도 몇 번 불안한 증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면 회복하길래, '조금만 더 써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바꿔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10시간이 넘게 꺼져있길래 정말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또 살아났다. 뭔 불사조도 아니고 매번 죽었다 살아나나... 기특하기는 하지만, 내 하루의 에너지 시발점인 '새벽독서'에 참여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니 미안하지만 교체해야겠다.


불사조는 이집트 신화의 베누 혹은 벤누(bennu)라는 새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데, 이 새는 태양신 '라'의 상징이라고 한다. 아라비아에 산다는 이 새는 500년마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자신의 몸을 불태워 죽고, 그 재에서 부활하거나 재생한다.


'불사(不死)'.

'죽지 않는 새'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죽고 다시 살아나는 새'로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이다.

'부활(復活)조'. 다시 살아나는 새, 거듭 사는 새.


영원이나 부활이라는 관념이 언제,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종교(宗敎 - 마루:종, 근본, 우두머리, 가장 뛰어난 것)'에서는 공히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종지(宗旨)'다. 이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현대인들은 설명 가능한 것, 증명 가능한 것이 아니면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많은 것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성이나 과학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어느 것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적인 시각을 경계하는 것뿐이다.


불사조는 자기를 모두 태워 재로 만든 후,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난다. '엔트로피 법칙'으로 보자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 현상계에서는 엔트로피(무질서한 정도)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기름을 연소시켜 열과 에너지를 얻을 수는 있으나, 이미 열과 에너지로 바뀐 것을 다시 기름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모두 불에 타 재로 바뀐 불사조의 몸이 재에서 몸으로 바뀌는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하나의 완성된 구성체를 가진 인간이 죽어 여러 원소들로 분해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죽음에서 생명으로, 분해된 원소들이 다시 하나의 인간이라는 완성된 구성체로 복원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현상은 눈에 보이는 물리세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고,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대 사람들은 그것을 눈으로 보고 경험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감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나를 더 높은 세계로 초대한다.

지금의 나를 죽이라 한다.

불사조처럼 자신을 불사르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라고 한다.


사람은 몸뿐만 아니라 이성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니,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생각을 바꾸고 영혼을 새롭게 하라는 소리겠다. 굳어진 인식의 틀을 깬다는 것은 나를 이루고 있던 견고한 구성체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니, 죽음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엔트로피 법칙'을 역행하고 무너져 흩어진 것을 다시 세울 수 있다.


세상이 그를 무너뜨릴지라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기를 거듭하는 사람. 우리는 그를 가리켜 불사조라고 한다. 한 인간은 물리 법칙을 역행하는 기적이며 초월적 존재다.


왜 다시 부활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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