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허락해준 잠깐의 수영
매일같이 반복 되는 일찍 잠드는 습관 때문에 오늘도 새벽 6시 눈이 떠졌다. 눈을 떠 주변을 확인하니 두명의 다른 여행자가 각자의 침대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어제의 피로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밝은 날의 니스가 너무나 궁금해서 참을 수 가 없었다. 이제는 호텔이 아닌 다른이들과 함께 있는 호스텔이기에 아주 조심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오늘은 니스의 바닷가를 한번 뛰어 볼 것이다. 다행히도 숙소의 위치가 좋다. 숙소에서 10분정도만 걸어나가면 바로 니스의 해변을 만날 수 있다. 마치 오래도록 덕질을 한 연예인을 처음 보는 마음으로 니스의 바닷가로 향했다.
낡은 골목사이로 나가 마주한 니스의 해변은 감탄 그 자체였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아름다웠다. 모든 색을 자기가 갖겠다는 어린아이 같았다. 초록빛부터 짙은 남색까지 바다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색을 품은채 느긋하게 뒤척이고 있었다. 아침의 파도는 세지 않았다. 아주 잔잔히 바다도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니스 해변의 자갈밭에 앉아서 한동안 멍하니 바다를 바라봤다. 아직 아침이라 서늘한 날씨임에도 70대로 보이는 프랑스의 노인들은 이미 이른아침 운동으로 바다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이 우리나라로 치면 뒷산의 약수터 같은 곳일지 모른다.
자갈 해변에서의 짧은 명상을 종료하고 니스 전망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망대라고 하기엔 좀 민망한 작은 언덕이 있다. 짧은 계단을 몇번 오르다보면 언덕의 정상에 도착한다. 그 언덕에는 니스의 풍경을 그려둔 그림이 있고 그 뒤로 그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뭔가 이 풍경은 바다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유럽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했을때 굉장히 좋아했다. 엄마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맨날 괜찮다며 즐겁다며 쉬지도 않고 살아가는 아들의 인생이 많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엄마의 표정은 언제나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엄마에게 사진을 보내니 너무 멋있다는 짤막한 답변이 돌아왔다.
언덕을 내려와서 어제 만난 현주에게 아침을 먹자고 연락을 했다. 마침 같은 방 사람들의 코골이에 일찍 눈을 뜬 현주는 바로 나가겠다고 답변이 왔다. 우리는 해변에서 만났다. 그리고 미리 알아둔 해변근처 빵집으로 향했다. 타르트가 유명하다는 빵집이었다. 우리는 줄을 서서 타르트와 크로아상 그리고 에클레어를 사고 각자 마시고 싶은 커피를 골라 주문하고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크로아상에 대한 감동은 이미 파리에서부터 경험을 했기에 적응이 되어있었지만 타르트와 에클레어는 달랐다. 적당히 달달한 시럽에 절여진 사과는 바스러진 페이스트리의 식감과 너무 잘어울렸다. 부드러운 빵속에 바닐라크림을 가득채워 놓은 에클레어는 심지어 살짝 차가운 온도감이 있어서 오히려 청량한 달콤함이 느껴졌다. 에클레어는 프랑스어로 번개라는 뜻이다. 너무 맛있어서 번개같이 먹어치운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아까워서 번개처럼 먹어치우진 못했지만 감전 당한 것 같은 맛이긴 했다.
그렇게 기분좋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낮수영을 하러가기 전 동네 구경을 좀 하기로했다. 카페에서 조금 나와 걸으니 올드 니스 안쪽에 시장이 열려있었다. 각종 꽃과 과일을 팔고 기념품 그리고 향신료를 팔고 있었다. 거기서 요즘 유행한다는 이른바 납작 복숭아를 몇개 샀다. 조금 이따 해변에서 수영을 하고 먹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주는 이 장터가 열리는 것을 알고 원래는 시간을 잡고 와서 구경을하려고 했다고 한다. 근데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놀라하는 모습이었다. 니스는 역시 해변가를 제외하고는 그리 볼 것이 많은 곳은 아닌거 같다고 서로 동의하며 웃었다. 복숭아 몇개를 손에 들고 수영 준비를 하러 잠시 숙소로 돌아왔다.
현주와 내가 머무는 숙소의 장점은 해변과 굉장히 가까웠다. 도보로 10분정도만 걸으면 되었기에 우리는 숙소에서 아예 수영복을 입고 위에 티 하나씩만 걸친 채로 해변으로 향했다. 시장에서 산 복숭아와 로제와인 한병을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우리가 니스에 도착안 이후로 날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딱 구름속에서 햇빛이 얼굴을 잠시 드러냈다. 마치 햇빛이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진짜 잠깐이야, 빨리 놀아”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지. 차가운 로제와인을 얼른 한잔 원샷하고 천천히 바다에 몸을 맡겼다. 물은 그리 차지 않았다. 하지만 맑았다. 파도는 좀 있는 편이었다만 물에 몸을 맡기니 그또한 즐거웠다. 생각보다 물은 깊었다. 조금 걸어가니 목까지 물이 잠기나 싶더니 어느새 발이 닿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꽤나 많은 외국인들이 깊은 곳에서 물에 떠 유영을 하고 있었다. 현주는 미리 준비해온 튜브를 팔에 끼고 여유롭게 바다를 즐겼다. 나는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기 스포츠단서 부터 갈고 닦아온 수영실력을 뽐내려 했다. 하지만 일렁이는 바다에서는 결국 개헤엄이 최고다. 그래도 태양이 준 1시간의 시간동안 체력이 방전되도록 수영을 즐겼다. 확실히 자연과 온전히 하나 된다는 느낌을 주는건 수영이다.
니스의 해변은 모래가 아닌 검은 자갈로 이루어진 자갈해변이다. 물에 젖은채 모래가 들러붙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너무 좋았다. 물에서 나와서 젖은채로 자갈밭에 누워 뜨거운 햇살을 받으니 따뜻하게 익어가는 느낌이 맥반석 오징어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에 있을때는 햇빛을 마주해야하는 순간들이 오면 항상 피하려고 했다. 얼굴이 타니까. 근데 여행을 오고 나서 좋은 점은 햇살을 즐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햇살을 온 얼굴로 맞고 있자니 진정한 자유를 얻은 느낌을 들었다. 해변에 누우니 햇살이 나를 온통 덮었다. 그리고는 다시 차가운 로제와인과 납작 복숭아를 한입물었다. 와인의 온도와 복숭아의 과즙 그리고 눈 앞에는 부서지는 니스의 파도가 있으니 무엇하나 부러울게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적당한 행복이 좋은 것임을 일러주는듯 금새 먹구름이 지기 시작했다. 한방울 한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분전의 날씨는 온데간데 없어진 것이 어이가 없었다. 마치 이 정도면 됐지? 이제 들어가 라며 날씨가 우리의 등을 떠미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아쉬움이 있어야 다시 오고 싶은 법, 우리는 얼른 다시 옷을 입고 짐을 챙겨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비가 조금씩 오고 있었지만 숙소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해변의 여독을 따뜻한 물의 샤워로 씻어내고 잠시 누워 낮잠을 청했다. 낮잠을 자다보니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눈을 뜨고 둘러보니 동양인으로 보는 남자가 뒷쪽 침대에서 반갑게 인사했다. 한국말로 말이다.
“안녕하세요”
장발에 수염이 인상적인 한국 남자는 30살의 도한씨였다. 우리는 각자의 침대에 기대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도한씨는 안경브랜드의 마케터라고한다. 이번에 밀라노에서 새로 런칭한 브랜드를 홍보하기위해 파리 박람회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전에 잠시 니스에 들러 해변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몇일 먼저 유럽에 온것이다. 니스는 어제 날씨가 정말 좋았다며 어제의 니스를 경험하지 못한 나를 위로했다. 거의 매일 10시간씩 해변에 나가서 누워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구지 하지 않았어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주 잘 새카맣게 타있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서로 핸드폰만 보고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사이지만 여행지에서 이렇게 만나니 누구보다 반갑다. 그리고 누구보다 무슨일을 하는지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해진다. 짧은 대화였지만 도한씨 회사가 런칭한 안경브랜드를 언젠가 만난다면 이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굉장히 반가울 것이다.
도한씨는 따로 사온 점심을 먹으로 1층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나는 조금 휴식을 취한후 현주를 다시 만났다. 저녁에 새로 합류하기로한 또다른 동행을 만나러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니스에 왔으면 해산물을 제대로 먹어봐야지 하며 요리보다는 해산물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을 찾았다. 우리가 먼저 도착해서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고, 생굴과 딱새우 그리고 홍합찜을 시켰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행은 무엇이든 잘먹는다며 다 괜찮다고 했다. 물론 화이트와인도 빼놓지 않았다. 곧 새로운 동행이 도착했다. 23살의 다현이었다. 23살이라니, 어제 26살이라는 현주의 나이를 듣고도 굉장히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한 강자가 나타났다. 다현이는 지금 아일랜드에 6개월정도 어학 연수를 와있다고 한다. 디자인 전공생으로서 디자인으로 유명한 유럽의 각 도시를 방문해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니스는 오직 바다를 가보고싶다는 일념하에 왔다고 한다. 잠시 20대 중반 미국으로 떠났던 교환학생 시절이 생각났다. 점점 어린친구들이 부러워지는 걸보니 나도 점점 나이를 먹나보다.
다행히도 일행중에 해산물을 가리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스페셜 넘버원 제일 윗등급 굴을 시키고 싶었지만 종업원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 No, No.2”
1등급 굴은 오늘 들어오지 않았단다. 1등급이 없으니 다른 것은 제안한다기 보다는 2등급을 먹으라는 단호한 태도에 홀린듯 2등급을 달라고 했다. 2등급이면 어떠랴 니스에서 먹는 굴인데 말이다. 조리가 필요한 음식이 아니다 보니 음식은 금방 나왔다.
딱봐도 신선해 보이는 굴은 맛은 더욱 일품이었다. 정말 바다가 통째로 입안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는 굴을 초장에 찍어먹지만 프랑스에 왔으니 프랑스식으로 먹어보아야 한다. 예전에 미국에서 만났던 프랑스 친구는 굴에는 신선한 레몬즙 한두방울만 뿌려서 그대로 먹는다고 했다. 그때는 새콤달콤한 초장맛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그게 대체 무슨 맛이냐며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아주 신선한 굴을 먹으니 레몬 한두방울의 찬조만으로도 단맛 짠맛 감칠맛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역시 해안 도시에 왔구나를 굴을 먹고서 더 느낄 수 있었다. 딱새우는 쪄서 차갑게 보관되어 나왔다. 탱글탱글한 살과 머리 안쪽의 내장도 비리지 않고 감칠맛이 폭발 하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신선한 해산물을 활용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망의 하이라이트는 홍합요리였다. 조리법은 간단해 보였다. 마늘이나 양파 샐러리 같은 향신채에 버터 그리고 파슬리 딜과 같은 허브를 조금 넣고 잘손질된 홍합과 화이트와인을 넣고 우려 낸 느낌의 홍합술찜이다. 전체적으로 홍합을 먹을때마다 느껴지는 풍미좋은 버터의 향이 굉장히 기분 좋았다. 중요한 것은 홍합 자체의 맛과 식감이었다. 내가 자주 먹던 홍합탕 안의 단단하고 쫄깃한 홍합이 아니었다. 마치 모짜렐라 치즈를 먹는듯한 부드러움과 쫄깃함이 공존하는 식감을 가지고 있었고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홍합임에도 한입에 그 향이 가득했다. 그라고 그 양은 어찌나 많던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홍합양에 안에서 홍합이 자라나는 것은 아니냐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맛있는 해산물과 화이트 와인 한잔은 다현이에게도 좋은 니스의 시작이었고 나와 현주에게도 훌륭한 느낌표였다.
우리는 가벼운 늦은 점심을 뒤로하고 니스 관광거리가 모여있는 올드 니스를 구경했다. 올드 니스 작은 골목 사이사이에는 예쁜 빈티지 샵들과 식당들이 많았다. 중간에 어느 치즈가게를 갑자기 들어가게 되었는데 다현이가 갑자기 푸딩하나를 먹어보고 싶다며 구매했다. 나는 뭔가 꼬릿한 냄새가 가득한 치즈가게 였기 때문에 선뜻 뭔가를 도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저 없이 새로운 디저트를 시도해보는 다현이에게 나랑 현지는 놀란 표정으로 경외의 박수를 보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시도였다. 녹진한 커스터드 크림에 카라멜 시럽이 들어간 푸딩이었다. 마치 그 옛날 스카치 캔디의 맛을 떠오르게 하며 익숙한 듯 새로운 디저트였다. 역시 거침없는 새로운 시도 안에 즐거운 발견이 있는 법이다. 다현이의 도전에 자극을 받았는지 나도 갑자기 새로운 음식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길을 걷다가 본 식당에서 눈에 익은 메뉴를 봤다. ‘socca’라는 음식이었는데 호스텔에서 나눠준 니스 안내에서 본 병아리콩으로 만든 펜케이크이고 니스 전통 음식이라고 한것을 봤다.
우리 앞에 있던 외국인들이 먼저 소카 두개를 주문했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소카가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외국인들이 받는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외국인들에게 주인장은 와인같은 음료를 두잔 먼저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소카가 음료수 였던것인가 하며 궁금해하던차에 다현이는 참지않고 주인에게 그 와인같은 음료를 가리키며 물어봤다.
“Is this socca?”
그 한마디에 주인, 주인 뒤의 직원 그리고 음료를 받는 외국인들까지 모두 빵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주인은 말했다.
“No It’s wine!”
그 외국인들이 소카와 함께 시킨 와인을 먼저 주고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건 참지 못하는 다현이의 성격덕에 굳어있던 주인과 직원의 표정이 텁텁한 일상에 새로운 자극을 찾은듯 펄럭였다. 우리도 그 반응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주인에게 소카를 하나 달라고 시키고 잠시 자리에 앉았다. 금새 나온 소카를 보니 무슨 전병 같은 것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소카는 맛있어 보였고 기대를 안고 한입 먹었다. 하지만 세명 모두 말이 없어졌다. 생각보다 정말 아무 맛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밀가루에 물섞은 반죽을 아무 간도 없이 구워낸 느낌에 익숙하지 않은 병아리콩의 느낌이 좀 더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우리 셋 모두 눈을 보며 말이 없었고 좋은 경험이었다 하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다현이의 푸딩 시도와는 반대로 나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어찌 되었든 즐거운 올드니스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한번 더 전망대로 향했다. 그래도 오늘은 다현이가 있었기에 좀 더 제대로 된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확신의 MZ세대로서 우리에게 좀 더 확실한 구도와 포즈를 디렉팅 해줬고 바다에서 부터 니스 전망대 까지 꽤나 많은 좋은 사진을 덕분에 건질 수 있었다.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자유로운 것은 너무 좋지만 내 사진이 많이 남지 않는 다는 것은 아쉬울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동행을 할 때 말하지 않아도 아는 서로의 사진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때 끈끈한 한국인의 정을 느낄 수 있다.
니스의 전망대를 방문한다면 필히 석양이 지는 시간에 갔으면 한다. 니스의 지붕은 온통 붉은색이다. 석양이 지는 시간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니스의 붉은 풍경에 하늘의 붉은색이 덧칠된다. 그러면 그 풍경이 이탈리아 피렌체의 풍경 못지않은 절경으로 완성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이 살짝지나면 언제 그렇게 아름다웠냐는 듯이 다시 어둠속으로 그 색을 감춘다. 그 짧은 찰나에 본 니스의 전경을 잊을 수 없다.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우리는 서로를 위해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눌러줬다.
완벽한 사진을 건지고 나면 뭔가 홀가분하다. 꼭 끝내야만 하는 숙제를 끝낸기분이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해변으로 내려와 걸었다. 나는 서울, 현지는 부산, 다현이는 인천에 산다. 그래서 사실 접점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의외의 곳에서 접점을 찾았다. 현지가 부산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우리 아버지도 경상도 출신이다라고 말했고 그러자 다현이도 자기 아버지도 경상도가 고향이라 말했다. 오 셋다 경상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여기서 더 나아가 현지가 우리 아버지는 경남 산청 출신이라고 말하자 다현이는 화들짝 놀라며 우리 아버지도 산청 출신이라고 말했다. 보통 산청 출신이 많지 않아 두 분이 서로 알 수도 있다며 각자 아버지에게 서로 아버지의 성함을 보내며 혹시 아는 사람이냐 말하기 시작했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데 먼 타국에서 만나니 오죽 반가 울 수 밖에.
우리는 신기한 지연 이야기를 뒤로 하고 저녁 먹을 곳을 찾았다. 어제 현지와 빠에야를 먹었던 식당 근처에 기억에 남는 파스타집이 있어서 그곳을 한번 가보기로 했다. 무엇이 기억에 남냐 한다면 파스타의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자기 얼굴보다 세배 정도는 큰 파스타 접시를 하나씩 앞에두고 먹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래서 뭔가 국밥 같은 파스타라며 ‘국밥 파스타’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른바 국밥 파스타를 찾아 어제 갔던 먹자 골목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 갔던 식당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하나가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다현이도 다른 사람들이 먹고 있는 파스타 크기를 이제야 보더니 정말 국밥 같은 파스타가 맞다며 끄덕였다. 우리는 10분정도 기다리다가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무엇을 시켜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다현이가 옆테이블 아저씨가 먹고 있는 파스타가 너무 맛있어보인다며 물어봐야 겠다며 자리를 떴다. 나와 현지는 다현이의 즉흥성과 적극성에 눈을 맞춰 신기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고 오니 똔따렐리 감베리 파스타라고 한다. 우동면같은 똔따렐리 파스타면을 쓰는 새우 파스타 였다. 그래서 우리는 파스타 하나와 라자냐, 피자를 주문했다.
정말 최고의 저녁식사였다고 할 수 있다. 피자는 화덕에 구워진 포카치아 도우 위에 신선한 샐러드와 치즈가 올려져 있어서 상큼하게 먹을 수 있었고, 라자냐는 녹진한 볼로네제 소스에 부드러운 치즈가 들어가 육중하면서도 조화로운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베스트는 다현이가 알아온 새우 파스타였다. 우동면처럼 굵은 똔따렐리 면은 건면이 아닌 생면 같았다 식감은 쫄깃헀고 소스가 찰싹 붙어있는 생면의 장점도 느낄 수 있었다. 새우를 이용한 비스큐 소스로 만든 파스타였다. 새우 특유의 향이 면을 입안에 넣자마자 코끝까지 가득채웠다. 그리고 생면을 씹을때마다 올라오는 새우의 향과 감칠맛이 좋았고 그리고 함께 올라간 루꼴라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맛을 쓴맛으로 잡아줬다. 이정도 양의 파스타에 이정도 맛의 퀄리티까지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이게 휴양지의 음식이 맞나 싶었다. 우리 세명모두 음식에 대한 격한 만족감을 표하며 허기가 어느정도 채워질때까지는 우리 셋 모두 먹는 것에 온전히 집중했다.
배가 어느정도 차기 시작했고 맥주도 어느정도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휴양지의 밤이라니 너무 완벽하다. 기분이 좋아져 마음이 풀어졌는지 다현이가 갑자기 자기의 사랑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연히 말하면 짝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아일랜드에 오기전 활동했던 사진 연합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한다. 정말 그 사람과 딱 세마디를 나눠보고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외적인 이상형도 아니었고 그 사람이 뭔가를 잘해준것도 아니었는데 딱 세마디만에 뭔가 느낌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하는 해피 스토리로 이어지면 좋겠다만 이내 짝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좋아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티도 내보았다. 그리고 하루에 몇시간씩 그 사람과 연락하는데 온 정신을 쏟았다. 그 사람도 다현이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남사친 여사친으로 연락을 하고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람은 다현이를 ‘여자’로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는 다는 이유로 그게 너무 힘들어 다현이는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결국 일주일만에 7kg의 체중이 빠졌다. 그래서 다현이는 마지막으로 작은 위로라도 얻고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빠, 오빠 때문에 나 힘들어서 7kg나 빠졌어.”
근데 그 반대에서 들려온 한마디 답변으로 결국 다현이의 마음도 강제로 정리되어버렸다고 한다.
“근데 나보고 어쩌라고”
무심함. 맞다 그 상대방 본인이 다현이가 걱정되어 좋아해 줄 수 없는 일이며 어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작은 위로를 바랐던 어린 다현이에게는 그 말이 가슴 아주 깊은 곳을 찌르는 가시 였을 것이다. 그 이후 다현이는 정이 떨어져 더 이상 그 사람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서사가 그러하듯 여자가 멀어진 그때가 되어서야 그 남자가 다현이를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자는 늘 뒤늦은 후회의 동물인 법이다.
누군가 살면서 겪어봤을 법한 짝사랑 이야기다. 어찌보면 뻔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슬프지만 기뻤다. 현실적인 문제가 아닌 감정의 문제가 나의 일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그 순수함이 너무 예뻐보였고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기뻤다. 다현이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오히려 좋은 사람인거 같다며 웃었다.
“그 사람 아니었으면 제가 어떻게 7kg를 제 의지로 뺏겠어요! 정말 도움되는 사람이었던거 같아요!”
과거가 아닌 현재의 자신을 보며 긍정적인 해석으로의 전환까지, 기특함을 불러 일으키는 완벽한 마무리었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진심으로 공감해줬다. 내가 어릴때 겪었던 짝사랑의 경험을 돌이켜보면서 다현이가 느꼈을 감정을 지레 짐작했다. 이 책의 서론에서 말했던 것 처럼 직장을 갖게 된 이후, 30대가 된 이후 나는 정말 누군가를 감정적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도 한때는 누군가와 나눈 단 세마디로도 아니 그냥 한눈에 사랑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는 나에겐 관심도 없을 누군가에게 혼자 가슴 앓이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 기억을 다현이와의 대화를 통해서 떠올리게 됐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듣는다고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수 있지만 다시 한번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너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다현이의 러브스토리를 시작으로 우리는 각자의 사랑이야기를 맥주 한모금씩에 내뱉으며 시간을 보냈다. 니스의 거리에는 여유로움이 공기중에 떠다녔고 바람을 타고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있었다. 니스의 두번째 밤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