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
2020년 1월 말.
지금으로부터 약 4년 10개월 전의 이야기이다.
꽤 오래전에 경험한 일이라서 각색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독자도 있겠지만, 앞으로 쓸 이야기는 나에겐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고 여전히 이에 대한 악몽을 꾸고 있다. 흔히 말하는 트라우마 증상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특정 장면들이 플래시백(flashback, 현실에서 어떠한 단서를 접했을 때 그것과 관련된 강렬한 기억에 몰입하는 현상)이 되기에 모두 직접 경험한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글을 쓰는 내내, 속이 너무 안 좋고 어지러워서 요즘에 꽤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느 정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인 것 같다. 멀미가 나는 느낌이고 심장도 아프다.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건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힘든 일을 겪었지만 현재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이것만큼은 사실이기에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 같다. 그리고 나보다 더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이 많다는 걸 알기에 어쩌면 나의 아픔은 별 거 아닌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종종 하며 살아간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 브런치북을 쓰게 된 이유는 내면에 있는 충족되지 못한 인정욕구와 따뜻한 온기가 필요해서 시작했다. 그동안 다정한 사람이 고팠고, 너무 외로웠던 탓일까. 힘든 시기를 지나며 다양한 글을 쓰고 읽었는데,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던 톨스토이가 쓴 소설의 첫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들이 정말 많았던 기억이 난다. 나의 불행의 끝은 어떨지 궁금하고, 어쩌면 예상이 돼서 조금은 슬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직 살아갈만하다는 걸 이 여정을 통해 깨닫고 싶다. 남루한 하루에도 유려한 말과 삶이 다가오길, 소격감은 자족감으로 대체되는 날이 오길. 나의 하루에도 아침이 찾아오길 바라고, 바란다.
흑기사의 등장, 불행의 시작.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기다리고 있던 시기였는데, 나는 작년부터 공부에 흥미가 생겨서 매일 같이 독서실을 다녔고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아주 추웠던 어느 겨울날.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엄마가 퇴근할 때(6시) 집에 같이 들어가기로 약속을 해뒀는데 밤 10시가 지날 때까지 엄마가 연락이 없길래 조금은 화가 난 상태로 책가방을 챙겨서 혼자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 순간,
평소에 느꼈던 온기가 아닌 차디찬 냉기가 느껴졌다.
엄마는 진한 화장과 호피무늬의 짧은 치마, 검정 스타킹을 신고 있었고 아빠는 몹시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엔 표정이 좋지 않은 오빠들까지.
분위기가 안 좋았던 이유는 꽤나 놀라웠다.
아빠가 엄마 직장에 커피를 가져다주려고 갔는데 알고 보니 엄마는 그날 출근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는 척 근무복을 챙겨갔지만, 다른 곳에 놀러 간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빠는 몹시 화가 났고 서로 다투다가 오빠들의 만류에 상황은 무마됐다. 진실은 밝혀내지 못한 채로.
사실 나는 그때 엄마가 출근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전에 엄마 폰을 빌려서 하다가, 밤 10시쯤에 "흑기사"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는 사람이 ♡(하트 이모티콘)을 보낸 걸 봤기 때문이다.
그때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리지만 알 건 다 아는 나이다.
믿고 싶지 않아서 회피를 했을 뿐.
2020년 2월 초 ~ 중순
갑자기 엄마에게 나타난 "흑기사"라는 존재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했고 많이 혼란스러워서 아랫집에 사는 이모(엄마의 동생)에게 가서 내가 본 사실들을 이야기했다.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고 일단은 지켜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며칠 뒤엔 오빠도 이 상황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흑기사는 누구길래 엄마의 마음을 훔친 걸까.'
'엄마는 왜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 걸까.'
그 당시의 나는 이 상황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막장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들이 현실에서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처음엔 비현실감이 들었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물음표 중에서 가장 궁금했던 건 흑기사의 정체였다. 도대체 누가 엄마에게 ♡를 보낸 걸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