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처럼 사라진 나의 버킷 리스트
유럽 배낭여행을 몇 달에 걸쳐 계획했건만,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남편과 사귈 때부터 우리의 여행 버킷 리스트에 올라와 있던 나라, 그리스. 사실 그리스를 시작으로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시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었다. 유럽으로 떠날 채비를 마치고 오후에 그리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탈 생각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새벽, 남편에게 항공사에서 메일이 왔다.
유럽 여행을 계획하며 항공 시간이 변경되거나 터미널이 조정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기에 이번에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나 이게 웬 걸. 그리스에서 출국하는 표가 취소 됐다는 것이었다. 이미 숙소와 관광지 입장권까지 다 잡아두고 구매했는데 이제 와서출국 당일 비행기 표가 취소되었다니. 어안이 벙벙하여 무슨 일인가 살펴보았다.
운이 정말 나빴다. 하필이면 우리가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출국하는 바로 그날, 그리스 공항이 파업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에 들어가는 것은 마음대로였으나, 나가는 것은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날이나 다음 날 티켓을 알아보았지만 이미 매진이었다. 며칠씩이나 일정을 조정할 수는 없었다. 출국 당일에 비행기표는 물론 숙소며 입장권까지 취소해야 하기에 제대로 환불조차 못 받았다. 여행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파업하는 것은 이해하나, 고지를 이렇게나 늦게 받게 된 것이 억울하기도 했다. 대처 방법에 한계가 있었다. 머리를 싸매고 여러 경우의 수를 알아보았지만, 결국 그리스를 포기하기로 했다.
솔직히 속상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속상했다. 가장 기대하고 있던 나라 중 한 곳이었기도 했고, 아무런 보상도 없이 손해만 무지막지하게 보는 기분에 내가 분에 맞지 않게 일을 너무 크게 벌렸나 싶기도 했다. 때 아닌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는 정신을 부여잡고 다음 날 그리스 대신 이탈리아로 출국할 수 있는 항공권을 찾았다. 숙소도 다시 잡았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여행 계획이 무산됨에 감사할 부분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당시 메모장에 적어둔 글이다.
1. 일정이 빠듯해 2박 3일로 밭게 다녀야 해 아쉬웠는데 깔끔하게 포기하게 된 것.
2. 계획했던 아테네만큼이나, 아니, 사실 더 가고 싶었던 — 그리스라는 로망을 처음 안겨 준 — 산토리니를 가지 못했는데, 다음번에 제대로 가고 방문할 명분이 생긴 것.
3. 산토리니를 포기하고 아테네에 집중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계절이었는데 더 따듯한 계절에 방문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
4. 그리스까지의 비행은 24시간을 훌쩍 넘기고 9시간 이상을 경유까지 해야 했는데, 이번에 바로 이탈리아로 넘어가며 직항으로 표를 끊게 된 것.
5. 너무 바쁘다 보니 제대로 여행 준비를 하지 못해 스트레스였으나 하루 더 준비할 시간이 생긴 것.
6. 묵고 있는 숙소에 신청할 때, 날짜를 잘 못 세어 하루 더 길게 잡아 놓은 탓에 자연스럽게 하루 더 지낼 수 있게 된 것.
2025. 02. 24
안 좋은 일은 빨리 잊어버리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로 했다. 순간 당황했지만, 차분히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리스 일정이 취소된 것이 진심으로 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2주가량 머물 수 있게 되었는데, 아주 알차게 속속들이 여행할 수 있었다. 일정을 더 늘려 다행이라고 생각들만큼 이탈리아에서는 볼 것도, 할 것도 많았다. 새로 이탈리아에서 잡은 숙소는 로마 중심부에 있어 초반에 여행하기 아주 편리했고 만족스러웠다. 지나고 보니 우리가 떠난 여행 목정상 모험에 가까운 배낭여행이었기 때문에, 휴양이 주 목적인 그리스만 나중에 따로 제대로 여행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우리의 유럽 여행. 안전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