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 경복궁 • 국립 중앙 박물관
지난 주 1편에서 이어집니다.
이튿날부터 시부모님과 본격적인 서울 관광에 나섰다. 남편은 어학당에서 오후 수업을 듣기에 점심까지는 함께 동행하기로 하였다. 첫 번째 관광지는 서울의 중심, 광화문이었다. 시간을 따로 맞추어 가지 않았는데도 우연히 수문장 교대식 시작 직전 도착하였다.
공연 관람을 마치고 경복궁을 둘러보았다. 한옥을 좋아하는 남편은 신이 나서 시부모님을 곳곳에 모시고 다니며 이런저런 설명을 드렸다. 남편은 온갖 지식을 동원해 나도 몰랐던 사실까지 알려드렸다. 남편 입장에서는 부모님께서 우리 부부와 오롯이 보낼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거니와, 더군다나 이렇게 한국까지 오셔서 아내의 배경에 대해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기 때문에 더 들떴던 것 같다.
남편이 경복궁에서 참 좋아하는 연못이 있는데, 겨울이라 연못이 얼어버리고 풍경도 여름 같지 않아 조금 실망한 듯했으나 눈이 온 것도 나름대로 낭만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밖을 걸어 다니다 보니 너무 추워져 근처에 민속 박물관으로 피신을 갔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씩 시켜 들고 민속 박물관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옛날 가정집 내부가 꾸며져 있는 모습이 꽤 흥미로웠다.
점심으로는 샤부샤부를 먹었는데, 대성공이었다. 시부모님께서 굉장히 좋아하셨다. 나중에 듣기로 한국에서 먹은 것 중 탑 3 안에 들 정도로 맛있었다고 하셨다. 입맛에 맞으실 만한 메뉴 고르는 것에 꽤나 머리를 썼기에 뿌듯했다.
점심을 먹고 남편은 어학당으로 떠나고 나와 시부모님은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향했다. 언제 가도 기분 좋은 곳이다. 물론 길을 헷갈려 연대기를 거꾸로 관람하게 되었지만, 두 분 다 워낙에 박물관을 좋아하시는 분들이기에 즐겁게 관람하셨다. 다만, 최대한 요약하고 줄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짧은 시간 안에라도 모두 보여드리려다 보니, 후반에는 좀 지치시게 된 것 같아 후회된다. 그래도 집에 일찍 들어가셔서 쉬면 되니 괜찮다고 생각했건만 진정한 악몽은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시작되었다.
한국이 낯선 건 마찬가지다 보니 시행착오가 생겼다. 집 근처 역까지 잘 도착하여 이제 마을버스만 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은 같은 마을버스여도 다니는 경로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거리 앞에서 내려 숙소에 가야 하는데, 우리가 탄 버스는 사거리를 지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은 경로가 달라도 세월아 네월아 타고 있으면 한 바퀴를 돌고 나면 경로가 또 바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리 없던 나는 버스를 잘 못 탔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말았다.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나 또한 한국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수는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있었을 때라는 것이 문제였지.
급하게 시부모님과 버스를 내리고 지도를 확인하니 다행히 조금만 걸으면 숙소였다. 시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는데 아뿔싸, 어마어마한 오르막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버스 정류장으로 이제와 돌아가기도 애매했고 또다시 잘 못 탈 가능성이 있었다. 이제 와서 얘기하자면 이때 택시라도 불렀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택시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서울에서만큼 택시가 보편화되어있지도 않아 익숙한 선택지가 아니기에 카카오 택시 앱조차 없었다.)
오르막은 생각보다 길었고 험난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긴장감에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어찌나 죄송스러웠는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도를 보던 내 핸드폰마저 꺼지고 말았다. 간당간당하던 배터리를 보며 제발 꺼지지 말아라, 하고 속으로 간절히 빌었지만 결국 까만 화면만이 내 손에 남겨졌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진심을 다해 울고 싶었다.
장시간 비행에 하루 종일 관광하랴 돌아다니시다 며느리의 실수 탓에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시는 시부모님께 상황을 고백했다. 다행히 보조 배터리가 있으셔서 빌려 겨우 다시 길을 찾았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시아버지께서 한 마디씩 가볍게 던지셨으나 시어머니께서 너무 힘들어하셔서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거듭 사과를 드렸다. 그다음 날까지도 나의 사과는 계속되었으나 과연 용서받을 날이 올진 의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오르막길이었다. 억 겹보다도 긴 침묵이 흐르고,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듯 숙소 앞에 도달했다. 숙소에 도착하고 나는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으나 운명은 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 그날따라 남편이 숙소 열쇠를 가져가는 바람에 남편이 올 때까지 시부모님 방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정신이 하나 없었다. 이렇게까지 당황했던 적이 언제였더라.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는 말이 온몸으로 실감 됐다.
너무나 긴 하루는 끝이 나지 않았다.
아, 역시 쉬운 일 하나 없다.
다음 주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