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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 Aug 29. 2023

역할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우리_

역할은 역할, 나는 나 일뿐. 

오늘은 교직원 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며 내 앞 쪽에 앉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교수라는 직함을 빼면 그들 역시 그저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직업으로서의 나라는 정체성은 내가 가진 역할로 이루어진 많고 많은 자아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가끔 직업인으로서의 자아가 자신의 전부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한다. 역할들에 갇혀 내 시야가 한없이 좁아져 나 자신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거나 상대방이 너무 커서 위압감이 느껴질 때면 나는 상상해 본다. 우리는 그저 같은 사람일 뿐. 집으로 돌아가서 밖에서 쓰고 온 감투를 벗어던지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나이라는 숫자가 새삼 실감 나는 민낯의 나와 마주하게 되는 것. 

     

어쩌면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나의 직업을 웬만하면 밝히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상대방이 나를 내가 아닌 직업으로서의 나로만 생각할까 봐.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봐주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싶다. 어쨌든 사람들은 각자가 자신만의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순간이 있기는 한 걸까. 내가 맡은 수많은 역할들이 아무것도 아닌 본연 그대로의 '나'라는 존재를 잠식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상담사, 엄마, 딸, 아내, 며느리, 주부, 그냥 나로서의 나는 매 순간 다 같을 수가 없다. 잘 알면서도 나는 종종 엄마인 나에게 상담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며 질책하기도 하고, 잘 안다고 믿었으나 그 역시 역할로서의 한 부분일 뿐이었던 상대방에게 나도 모르게 실망하고 상처받곤 한다. 


나는 내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가진 수많은 역할들 덕분에 본연 그대로의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나'란 존재가 이토록 다채롭고 내면이 풍부한 존재인 내가 될 수 있었음을. 엄마이기 때문에 상담사로서 학생들에게 좀 더 풍부하게 공감해 줄 수 있고, 상담사이기 때문에 엄마로서 내 아이의 마음을 좀 더 살필 수 있게 된 것과 같이. 

세상에 같은 역할을 하는 이는 많지만 나는 단 한 명뿐이기에 그 모든 역할들을 굳이 내가 다 잘 해낼 필요도 없고, 단지 그러한 역할들에 본연 그대로의 타고난 '나'라는 존재가 더해져 지금의 특별하고 평범한 내가 되었음을. 

앞으로 나는 사람들을 역할이 아닌 그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 가기 위해 노력하는 한 사람으로 보아주고 싶다. 나 역시 역할이 아닌 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언제든 갈아입으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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