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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그리 유경미 Oct 14. 2024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이겨내는 모든 이들에게

 요즘 새벽 다섯 시가 되면 잠이 깬다. 잠이 많던 나에게는 엄청난 변화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러 깨는 것인가. 설마 그럴 리 없다.

  가을이 오고 있다나. 20일이 넘는 열대야를 보냈다. 아직 제주도는 오늘로 46일째 최장 시간의 열대야를 버틴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복더위가 지나 입춘이 지나면 열기가 식는다 하지 않았던가. 올해는 24절기의 신비가 사라진 느낌이다. 무심한 날씨를 탓하고 앉아있다.

  난 더위를 잘 참았다. 나의 갱년기가 오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든 잘 참는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만, 특히 더위는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참기 쉬웠다. 누군가를 상대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모든 자연현상이 그러하듯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어딘가에 탓할 필요가 없다. 땀을 흘리는 모습에서 일상과는 또 다른 환희와 감명을 받지 않던가. 이런 상황에서 나의 올해 더위 참기는 최악이고 참패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가까워 온다. 호기롭게 시작한 나에게 위기가 오고 있다. 허둥지둥 대며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객관적인 판단을 할 새가 없다. 빨리빨리 만들어 서류를 내야 하고, 쌓인 일을 재치 있게 마무리해야 한다. 여러 개의 산을 넘겨야 하는 일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돈 계산을 해야 하는 일에는 차라리 ‘쉽다’라고 판단했다. 여러 사람이 얽혀 있는 학교에서 질서를 잡아나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서 나란 인물을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멀티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 가지 일을 쭉 해왔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에 동시에 여러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조금 착각이었다. 첫 아이를 키울 땐 처음이라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씻기느라 얼마나 허둥댔던가. 아이 젖을 물리는 동안 쉬고, 아이가 잠깐이라도 자는 순간에 밥을 차리고 화장실을 가지 않았던가. 익숙한 1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둘째를 낳고서야 해야 할 일을 파악할 수 있던 건 아니었을까. 이건 아마 멀티플레이어를 하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셋째를 낳고는 완전히 날아다녔다. 동시에 여러 일이 가능해졌다. 아이 셋을 키운다는 일이 당시에는 그리 특별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대단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은 입에 발린 말이라 여겼다. 그냥 국가에서 셋을 키우면 지원해 준다느니 저출산이라 국가에 큰 일을 하는 거라니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난 좀 대단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엄마라는 캐릭터에 몰입했다. 내가 없었다. 육아를 끝나서야 현 상황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탈피를 하고 있다.

  멀티플레이어가 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아이를 키우는데도 세 번의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막상 실전에 투입되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한다. 미약한 존재였다. 집안일을 해오면서 가장 하기 힘들고 싫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전화로 말하는 일이었다. 가끔 자장면을 배달해서 먹자고 하면 남편에게 떠밀었다. 그게 뭐 별일이라며 남편은 처음 몇 번은 본인이 주문했다. 누군가와 말하는 자체를 많이 해보지도 않았으려니와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기피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은 본인이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배우자가 없는 상황을 상상하게 했다. 남편은 본인이 없으면 어떻게 삶을 살 것인지 걱정했다. 돈을 자신이 벌고 있는 외벌이 상황에서 자장면 배달 전화도 하지 못한다면 어떡하냐고 말했다. 나의 봄은 언제까지나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나의 동반자는 언제까지나 함께 하지 않음을 알지만, 바로 앞에서 자신이 없어질 수도 있음을 공표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나는 배달 전화는 물론이고, 학교에서 학부모들의 민원 전화를 받고 있다. 이 정도면 탈피에 성공한 게 아닐까.

  여름을 지나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풀벌레가 고맙다. 오랜 여름을 축하해주는 새벽 음악회가 나를 깨웠나 보다. 엄마로서의 인생을 축복해주고 동시에 나의 새로운 일을 응원하며 긴긴 여름에도 이렇게 시간이 지날 수 있음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위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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