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하느라 손이 떨렸다
국수를 끓이려 냄비를 찾았다. 우리 집에는 개수대 아래 선반에 포개진 여러 개의 냄비가 있다. 그 가운데 코팅한 2, 3인용 깊은 프라이팬을 꺼냈다. 웍이라 불리는 이런 냄비들은 채소를 삶거나 국수를 삶을 때 헹구기 위해 쏟아야 하므로 요긴하다. 일반 냄비보다 잡기도 쉽고, 다양한 요리에 적절하다.
허리를 펴고 일어나 개수대 수도를 틀어 물을 받았다. 1인분이 아니라 물 눈금은 제법 올라갔다.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가만히 떨어지는 물을 보자니 잡생각이 들었다. 오늘 일했던 것들이 폭포수가 되어 떨어졌다. 머릿속을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아니 지우려 했다. 그러나 잘 지워지지 않았다. 일터에서 있었던 일을 집에 오면 딱 끄고 생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덧 예상한 양의 물을 받았다. 수도꼭지를 잠궜다.
웍 손잡이를 들고 오른쪽의 가스 불로 이동하려 몸을 도는 순간이었다. 개수대 모서리에 겨우 걸쳐있는 행주가 웍의 이동구간에 위치해 있었다. 물론 몸을 움직이면서 행주는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갖가지 문제점이 솟구쳤다. 프라이팬을 든 채 행주를 집을 것인가. 프라이팬을 가스 위에 얹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싱크대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행주를 올린 다음에 팬을 가스에 올릴 것인가. 다음 행동을 위해 결정은 해야 했다.
내 선택은 가스 위에 먼저 웍을 얹는 일이었다. 행주는 지금 그리 중요 대상이 아니었다. 국수를 삶는 일이 가장 최우선으로 선택되어야 할 일이었다. 잠깐 스친 여러 생각은 오늘 내가 겪은 업무에서도 닥친 상황이었다. 어떤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업무일지 정해두는 일이 필요하다. 우선순위로 정했던 일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손이 느리고 처음 접한 일이어서 처리는 되지 않고 일은 쌓여만 갔다. 그러다가 모든 일이 임박해서 닥치면 멘탈 붕괴가 온다.
어쩌면, 20대였다면 멀티플레이어가 가능했을지 모른다. 웍을 집은 채 행주를 순식간에 낚아챘을 수 있다. 순간의 포착이 가능한 나이였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청년을 지나 장년으로 운동 능력들이 떨어져 가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은가. 이 상황에서 나는 20대일 수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때는 피구를 좋아해서 공을 잘 피하기도 했다. 키는 컸지만, 몸은 날렵했다. 예전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 상황은 그저 웃기다. 그런데 슬프다.
상상을 해 본다. 행주를 집으려 고개를 숙였을 때 물을 엎질러 쏟아 뜨릴 거라는 생각, 허리가 최근 좋지 않아 숙이다가 허리를 다시 삐끗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동시에 하려 한 나의 오만함을 잠재워주는 생각들이 나를 하나씩 천천히 하라고 다독인다. 나이가 들면 하나의 행동을 더욱 조심스레 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시뮬레이션까지 해야 마음이 편해지니 무언가 나에게도 변화가 찾아온 듯하다. 더욱 신중히 생각하고 동시에 우선순위를 매겨 정말 중요한 필요한 것들을 하라는 신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국수를 맛있게 먹으며 천천히 생각한다. 순서를 정하니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