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옆에 있다는 건
운전 중 신호에 멈춰 섰다. 왼쪽 지시등을 켜고 좌회전을 할 요량으로 기다린다.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좀 특이하다고 느꼈다. 바로 앞에 육교가 있고 그 육교에 네 개의 동그라미가 간격을 두고 쌍을 이루어 붙어 있었다. 거참 특이하다, 생각하면서 보고 있자니 신호등과 신호등 사이에 비둘기 한 마리가 걷는 모습이 보였다. 날이 더우니 육교 아래에 그늘진 공간이 피해 있기에 얼마나 좋은가 하며 바라다봤다.
예전에 비둘기는 새 중에 귀한 새였다. 흔하지 않았다. 88 올림픽 때 비둘기를 날려서 많아졌다고 하는 소문을 들은 일이 있다. 어릴 때 비둘기는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에서나 보았던 동물이었다. 도시에 가면 있다고 들었다. 텔레비전에서 올림픽 공원에 아이들이 뛰어가면 비둘기들이 날아오르는 장면을 보았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비둘기를 아스팔트나 시멘트가 깔린 도시에서 쫓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시골에는 심어놓은 콩을 파먹거나 따먹는 귀찮은 존재로 전락했다.
비둘기는 걸음 폭이 작다. 짧은 두 다리의 폭은 어림잡아 어른 손바닥 길이 정도가 아닐까. 어린아이들이 걷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앞에 구덩이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과자부스러기를 좇아 앞으로, 앞으로 지나간다. 좋은 것만 따라가는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길에서 뒤뚱뒤뚱 대며 걷고 있는 비둘기를 보고 있노라면 눈이 나쁠 것이라 확신한다. 사람들이 지나다녀도 보는 건지 마는 건지 제 할 일만 한다. 어쩌면 아이들처럼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비둘기의 세상에서 사람은 자신들을 쫓아내기만 하는 귀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오래 걷기만 한다. 잘 날려고 하지도 않는다. 날개는 폼으로 달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걷거나 뛴다. 사람과 같이 살아서일까. 사람을 무서워하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비둘기를 놀라게 할 심산으로 몸집이 큰 독수리처럼 날개를 크게 펼치고 덤비는 듯한 몸짓으로 비둘기를 놀래키면 깜짝 놀라 날아오르기는 한다. 그런 가운데 어떤 놈은 눈치를 알고 잠깐 날아올랐다 이내 내려앉는다. 예전과 다르게 비둘기는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인간 세상에 함께 적응해 살고 있는 동물이 되었다.
산에 오를 때 비둘기를 만난 일이 있다. 두 마리가 짝인 듯 싶었다. 한 마리는 제 할 일을 하면서 눈앞의 먹잇감을 찾느라 바빴다. 다른 한 마리는 앞의 한 마리를 바라보며 쫓아가느라 바빴다. 말을 걸었다. “뒤에서 부르는데 같이 좀 가라.” 양방향으로 뒤뚱이던 머리가 멈췄다. 둥그런 조그만 머리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래, 뒤에 짝이 있다고. 눈빛으로 비둘기에게 신호를 보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통 알 수 없었다. 그냥 다시 제 갈 길로 가는 것 같았다.
먹이를 다 찾아 없다고 느낀 걸까. 앞서가던 비둘기는 커다란 나무를 향해 날아올랐다. 당황하던 뒤쪽 비둘기는 짝의 냄새를 따라 날개를 폈다. 인생의 반려자를 찾아 얼른 날아가라고 기도해주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짝을 만나는 일은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번식을 위해서라기보다 홀로 세상을 나서기 어려울 때 조력자가 있으면 한결 마음이 편안하고 좋을 수 있다.
신호가 바뀔 찰나 신호등으로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들었다. 산에서 보던 비둘기처럼 짝이 있었나 보다. 더운 여름의 햇빛을 피해 신호등 사이의 그늘로 들어온 짝꿍을 보러, 한 마리가 이곳으로 찾아들었다. 신호등 옆 비둘기가 나 같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뜨거운 햇빛에 먹을 것 없는 도로 한복판에 단지 그늘이라는 그곳으로 날아간 비둘기였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짝꿍을 만났다.
인생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안다. 누군가 인생의 바퀴를 돌려야 굴러간다. 거대한 인생의 기계 안에서 조그만 톱니바퀴 같은 작음 부품을 움직이게 하기만 해도 덜컹거릴지라도 움직인다. 게다가 여러 사람의 도움은 필요치 않다. 단지 나를 응원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 인생에 날아오는 한 마리의 비둘기를 못 본 척 넘어가 버리면 어쩌면 인연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만날 운명이라면 또 한 번의 인연이 생기지 않을까.
날아든 비둘기와 함께 산 지 스무 해를 넘어선다. 아무것도 없었던 인생의 높은 산 조각들을 일구고 넓은 평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또 한 해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