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와 서서히 친해지기란
컵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먼저 누워있던 티백이 물을 따라 떠오른다. 마시기 적당한 정수기의 온수다. 김이 모락모락 뿜어 위로 오른다.
티백이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티백이 되어 있었다. 겉봉지 안에 들어있는 부엌 한 구석의 티백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던 나였다. 40년 이상 살면서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삶을 허투루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었다. 물이 흘러가는대로 그 물을 따라 살아온 나였다. 어느 순간 살아온 삶에 대해 반성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1학년 아이는 언니가 하는걸 따라 하고 싶었다. ‘고려 컴퓨터 학원’이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언니는 컴퓨터를 배웠다. 미리 따두면 좋다는 말을 듣고 함께 나 역시 학원을 다녔다. 애니악, 진공관, 트랜지스터.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학원을 다닌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둥둥 떠다니는 컴퓨터 관련 용어들은 내 머릿속에 안착하기도 전에 나를 버리고 떠나갔다. 컴퓨터 워드 3급 필기시험은 그렇게 떨어졌다. 그렇게 나는 컴퓨터를 등졌다.
대학생이 되었다. 신문방송이라는 학과 과목들은 트렌드하고 빨라야 했다. 컴퓨터 사용을 잘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그 중 한 과목은 사설을 읽고 하루 한 번 일기쓰듯이 논리적인 글을 한 장씩 써내야 했다. 언론학도로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이었기에 매일매일 열정을 다했고 레포트를 일주일에 7장을 꼬박꼬박 제출했다. 밀리는 일 하나 없이 성실히 했다. 혹시나 타자수가 늘지 않으면 어쩌나 틈틈이 타자 연습도 했다. 한글 프로그램에 자신감이 붙었다. 컴퓨터가 나를 향해 웃기 시작하나 생각이 들었다.
순간이동으로 이십 년 넘게 시간을 점프했다. 작년에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도 이제 다 컸으니, 내가 무언가 하며 돈을 벌어야만 할 것 같았다. 서너 시간의 짧은 일은 살림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한 나의 방책이었다. 홀로 책을 사서 독학 한 달 정도 후 컴퓨터 활용 능력 2급 시험을 봤다. 떨어졌다. 연습 후 또 봤다. 또 떨어졌다. 노력하면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상기시키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또 시험을 봤다. 세 번째도 역시 떨어졌다. ‘난 원래 그런가 보다’ 싶어 그만하기로 했다.
몇 달 후 자격증이 나를 불렀다.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아쉬웠다. 선생님이 필요했다. 4시간짜리 일을 하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야간반 컴활 2급 수업이 복지관에 있었다. 마을버스로도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1분기를 신청하려면 날짜를 맞춰 클릭을 잘해야 했다. 신청 첫날이 되어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10시부터 접수인데 1시간 후 들어갔더니 마감이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수업인데, 마감이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석 달을 놀고 보낼 수 없어 또 다른 컴퓨터 관련 수업인 ITQ 수업이 있어 신청했다. 그래,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1분기에 ITQ 수업 석 달을 보냈다. ITQ(Information Technology Qualification : 정보기술자격)는 컴퓨터 관련 시험이 8과목 중 자신에게 맞는 시험을 보는 형식으로, 대부분 한글, 액셀, 파워포인트 시험을 본다. 세 과목을 모두 A로 따면 OA 마스터라는 자격을 준다. 한 과목은 B로 두 과목만 A를 받고 다음 분기에 컴퓨터 활용 능력 2급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모두 봐야 한다. 필기는 40문제를 컴퓨터 일반상식 20문제와 액셀 20문제를 평균 60점 이상 맞아야 통과다. 합격 후 실기시험을 보는데, 실기는 80점이 넘어야 한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컴퓨터를 싫어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할 수 있다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응원이 된다. 사회는 내 편이 되지 않아도 한 사람의 내 편은 인생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수업 시작 전 필기를 접수해 놓았다. 예전의 세 번 떨어진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힘든 것도 알고 있으니 떨어져도 또 시험을 보면 된다고 위로한다.
6월이 되었다. 나에게도 컴퓨터 자격증이 생겼다. 꿈만 같다. 컴퓨터 활용능력 2급의 필기시험은 한 번에 붙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전에 세 번 떨어진 경력이 있으니 네 번째에 붙었다. 그 후에는 실기시험을 결과를 보지 않은 채 세 번 연속으로 접수했다. 선생님 말에 의하면 결과를 보고 2주 후에 다시 시험을 보면 금새 잊어버리니 얼른 여러 번 접수해서 시험을 보는 게 낫다고 했다. 말대로 세 번의 시험을 이틀 간격으로 보았다. 시험을 볼 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나를 발견했다. 잊지 않도록 꾸준히 연습하는 게 묘수였다. 결국 컴퓨터 활용능력 2급을 취득했다. 그리고 지난번 B였던 시험도 다시 보고 A로 바꾸어 ITQ OA 마스터도 취득했다.
티백이 컵 안으로 내려앉는다. 세상 달관한 모습이다. 뜨거운 물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향을 모두 뿜어내고 나서야 하나의 온전한 차로 변할 수 있다. 언젠가 티백은 버려지겠지만 그 향을 기억하는 누군가는 또 그 차를 선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