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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그리 유경미 Oct 23. 2024

동그라미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당선작

  나는 동그라미다. 공 모양으로 모난 곳이 없다. 다른 사람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 잘 굴러간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일이라 생각한다. 무언가 궁금한 일이 있다고 해도 잘 묻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그 질문에 불쾌하지는 않을까, 나름 배려한다. 동그랗게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그래서 동그라미를 좋아한다.

  눈이 내렸다. 온도는 내려갔다. 입김이 나를 감쌌다.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깜깜했다.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더 이상 보기 힘들었다. 목이 아팠다. 내리는 눈이 나의 얼굴을 덮쳤다. 조그만 눈이 내 얼굴에 쏟아지니 눈을 뜨기 어려웠다. 얼굴이 시렸다. 이까짓 것. 눈을 떴다. 작은 하늘이 보였다. 검은색인가 자세히 살펴보다가 푸른빛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고 느꼈다. 사실은 노려보고 있지 않은, 그냥 하늘이었다. 하늘이 바라보는 게 나는 거북했나 보다.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둠 속을 걸었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바닥은 눈이 하얗게 쌓여 갔다. 뽀득뽀득 소리가 좋았다. 걸음을 멈추어 뽀얀 눈 위에 섰다. 예전부터 하던 대로 발자국으로 꽃 모양을 찍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꾹 밟았다. 발뒤꿈치를 한 방향으로 발가락 쪽 무늬를 연속으로 밟으면 하나의 꽃이 완성되었다. 해바라기 같았다. 나는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눈은 얼음이 되었다. 뽀독하던 보드라운 눈이 내려간 온도에 사각거렸다. 아침이 되자 빙판길이 되었다. 동그라미인 나는 빙판길에서 한없이 미끄러졌다. 접촉면이 적어서 끝없이 굴러갔다. 마찰 면이 적은 동그라미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내가 원하는 장소로 가려고 하면 훨씬 지나 원하지 않는 곳까지 닿았다. 쉽게 마음을 주어서일까. 모난 곳이 없어서 그런 걸까. 인생이 휘둘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는 얼음판을 살살 걸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스케이트를 배워 보는 건 어떤지 물었다. 어릴 때 친구들과 타 봤던 롤러스케이트에 많이 넘어져 다쳤다. 동네 친구가 태워 준 자전거를 타다 쓰러져 상처가 생겼다. 발이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전거를 배운 기억이 있다. 미끄러지는 건 무서웠다. 실수를 하는 건 더 무서웠다. 피해를 주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다. 조용히 굴러가는 대로 사는 걸 택한 건 이 모든 것들의 이유일지 모르겠다.

  나만의 원칙이 생겼다. 동그라미로 살아가는 동안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는 걸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냥 그대로 거기 있어 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아무런 힘 없는 동그라미인 줄만 알았다. 남들 눈에 띄지 않는 누군가로 남기 위해 애를 썼다.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에 단체 사진에도 늘 귀퉁이에 숨어 있었다. 얼음판에서 밀려나지만 않게 조심히 틈에 끼어 있었다. 누군가는 내가 거기 있었는지 모르기도 했다. 걸리적거리지만 않아도 충분했다.

  크기만 컸지 티가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키로 밀어붙였다면 나는 애초부터 대장에 속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앞에 나서 봐야 잘난 척한다고 비뚤게 보는 이들만 있었다. 쥐뿔 가진 것도 없으면서 나선다고, 모가 나기도 전 어릴 적 연약한 심장에 생채기를 냈다. 그래서였을까. 아무에게도 상처를 보이기 싫었다. 그저 괜찮다고 했다. 친구들에게 구체적이고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떨어져 살아 궁금해하는 가족에게도 늘 괜찮다고 했다.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검은 밤하늘의 눈 같았다.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조심히 다닐 수 있도록 애썼기 때문일까. 소리조차 목구멍으로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내렸을 뿐인데, 어느새 얼음판을 만들고 있었다. 언젠가 따스한 햇볕에 녹아 버릴지도 모르면서 더욱 견고한 얼음판으로 변하고 있었다. 늘 밤하늘의 눈처럼 아무도 모르게 살고 싶었는데, 온도를 낮추고 단단한 얼음으로 미끄러지기 쉬운 빙판길로 나를 조심스럽게 이끌고, 누군가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어설프게 나를 녹여 주어도 소용없었다. 얼음판은 더욱 견고히 얼어 버리고 말았다.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보였다. 이제 악마가 되는가. 차라리 악마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은 어디로 갔는지 세상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동그라미가 싫어진다. 미끄러지는 삶 속에 여지없이 굴러 버리는 나 자신이 슬퍼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하기도 전에 굴러가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 거라면 사는 의미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하고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욕심쟁이다. 어쩌면 내 몸뚱어리 다른 쪽에도 뿔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육면체 네모였을지도 모르겠다.

  애초부터 네모였을지도 모른다. 얼음판에도 단 한 걸음 미끄러지지 않고 삶을 지나치는 일 없이 꼼꼼하게 꿋꿋이 서 있었으리라. 다른 사람의 말에도 함께 미끄러지는 일 없이 굴러가지 않고 단단히 접촉면을 붙잡고 살았으리라. 열심히 굴러가고 끌려가고 있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내 고집대로 단단하게 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이미 완벽한 네모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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