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정적을 가르며 검은 옷의 젊은 사내가 카페 문을 연다.
오늘도 어김없이
두 잔을 오더 한다.
대기 손님이 없기에 주문한 음료는 바로 나온다. 양손에 한 잔씩 들고 그는 프로그램에 따르는 로봇처럼 항상 앉던 저 안쪽 구석 작은 테이블로 멍하니 걸어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그의 앞에, 딸기 스무디는 맞은편에 놓인다. 언제나처럼.
소곤소곤 그의 속삭임은 들릴 듯 말듯해서 당최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알 순 없다. 그저 그의 감정이 공기를 진동시킬 뿐. 때론 기쁨이 가벼운 공기방울처럼 내 귓불을 톡톡 간지럽히고, 때론 슬픔이 축축하게 바닥을 타고 기어 온다. 무엇보다 외로움의 파동은 가슴 저린 내 모성애를 자극해 그에게 다가가고 싶게 끌어당긴다.
모두가 쉬는 일요일 이른 아침마다 그는 무슨 사연으로 교회 옆 카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목이 말라 두 잔 시켰겠거니 했다. 아니면 다른 종류의 음료를 마시고 싶었던지.
인터뷰 연습을 하는 건가? 무선 이어폰을 끼고 누군가와 대화하나?
난 그를 6개월 넘게 계속 지켜봤다.
언제나 똑같다. 똑같은 시각, 똑같은 테이블, 똑같은 두 잔의 음료~
나의 호기심은 점점 커져 그에게 언제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 기회를 노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쉽게 몸이 움직여주진 않았다. 쭈볏쭈볏 방향을 그쪽으로 향했다가도 뭔지 모를 거북함과 싸한 느낌이 나를 막아 세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커피숍에서 그 남자를 관찰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어머~ 지연이 엄마 아녜요? 어마, 반가워라."
지연이 엄마는 오늘 소그룹 모임이 있어서 일찍 왔단다. 사실 좀 너무 일찍 와서 커피숍에 들어왔단다. 우린 반갑게 얘기하다 웃음소리가 너무 커지자 겸연쩍게 주변을 둘러봤다. 자연히 시선이 검은 옷 입은 남자에게 향했고 난 자연스럽게 화제를 꺼냈다.
"혹시 저 사람 알아요? 교회 다니는 사람인가?"
"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왜요?"
난, 지금까지 내가 관찰했던 것들을 지연이 엄마에게 이야기하며 그에 대한 궁금증을 토로했다. 조용히 다 듣던 지연이 엄마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혹시, 저번에 교회에서 시골로 가족봉사 갔다가 버스 전복사고 났던 것과 관련 있는 것 아닐까요? 그게 한 6개월 정도 조금 더 지났으니까 시기적으로 딱 그때부터네. 저 남자가 커피숍에 나타나 혼자 말하기 시작한 것이.."
"엄마야, 정말요? 그럼 그때 버스사고 때 가족을 잃었나?"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그때 학생들도 몇 명 죽었던 것 같던데. 혹시 딸을 잃었나?"
"그래서, 딸기 스무디?"
"아. 어떻게요. 그런가 봐요. 그 봉사팀 시골로 떠나기 전에 모임을 매번 여기 커피숍에서 했잖아요. 혹시 저 자리가 딸애랑 앉았던 자리 아닌가 모르겠네요. 음료도 아이가 여기서 먹던 딸기 스무디고..."
충격적이고 암울한 사연에 내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어떻게 자녀 잃은 부모 맘을 위로해 줄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주제넘게 감히 위로의 말을 건넬 순 없었지만 그를 볼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런데 정확히 이 주 후에 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커피숍에 등장한 그가 혼자가 아녔다.
똑같이 검은 옷에, 똑같이 두 잔의 음료를 시켰고, 똑같은 자리에 앉았지만 이번엔 그 앞에 한 여성이 있었다.
내 눈은 동그래졌고 내 귀는 그들을 향해 활짝 열렸다.
"오빠, 그동안 나 많이 보고 싶었어?"
"그럼, 그래서 너랑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곳에 일요일마다 와서 너 좋아하는 딸기 스무디도 시켜놓고 너랑 대화했지. 이제 곧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야 하지?"
"응, 오빠~ 이제 결심은 선거야?"
"응, 네가 없는 동안 많이 생각해 봤어."
"..."
"나, 너와 함께 하기로 결정했어."
"아, 정말? 고마워, 오빠. 정말 고마워! "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지만 난 그들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6개월 동안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바닥에 엎어져 뒤섞인 물감이 되었다. 딱히 이름 지을 수 없는 색으로.
호기심, 염려, 슬픔, 공포, 연민, 경악, 기쁨, 안도, 허무로 뒤엉킨 색은 내가 그린 스토리를 어지럽게 뒤덮고 있었다.
그랬다.
내가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은
배신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