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또각! 그녀의 첫 등장은 빨간 뾰족구두와 함께였다. 세련된 외모에 눈웃음이 매력적인 그녀. 분명 65세 이상이 받는 50% 할인을 받으셨는데 나이가 가늠이 안된다. 첫날부터 영어를 어떻게 공부할 건지 수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선생님 이력은 어떻게 되는지 온갖 질문 공세를 펼치며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다소 남을 판단하는 듯한 특이한 말투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례하게 굴진 않았다. 처음에는...
그녀는 그다음 날부터 수업 전 30~40분 전에 미리 나타났다. 와서 신문을 떡 하니 책상에 넓게 펼친다. 언제나 맨 뒷자리에 앉아서. 모든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자리다. 신문을 뒤적뒤적하며 논평을 시작한다. 특정 정치인 욕으로 시작된 평은 '요즘 젊은것들은'이라며 길게 이어진다.
하루는 명절에 대한 주제로 영어수업이 진행되었다. 자녀들이 추석에 해외여행 간다고 미리 다녀갔다고 말씀하신 분도 있고 이제는 자녀들에게 제사상 차리는 것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도 있었다. 이에 그녀 표정이 일그러졌다. 부모를 공경해야 자녀들이 잘 된다며 혀를 찼다. 제사상을 잘 차려야 조상님들이 복을 주신다고. 방금 조선시대에서 순간이동해 온 듯했다.
늘 수업에 대해서도 의견이 많으셔서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요구사항이 끊임없다. 다른 곳에서는 수업을 이렇게 하니까 좋더라. 이 책을 복사해서 모두에게 나눠주고 이것을 교재로 사용해라. 지금까지 설명한 것 너무 빨리 말했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전부 그대로 천천히 말해라. 수업 중에 영어를 너무 잘하는 사람은 말을 못 하게 금지시켜라.
수업에 본인보다 영어로 말을 많이 하면 아주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표한다. 일단 뒤에서 혼잣말로 뭐라 들릴락 말락 한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때로는 일부러 또각거리며 아예 교실을 나간다. 그녀가 타깃으로 삼은 일인이 있다. 커피맨이다(가끔 커피를 들고 오셔서 커피맨이라 부른다).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못 견딘다.
어느 날 올 것이 왔다. 그날도 그녀의 불평은 이어졌다. 남의 말은 듣기 싫다. 강사 강의 들으러 왔으니 bronken English 하는 사람은 말 못 하게 막으라는 하명이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를 망치곤 하는 빨간 구두가 싫었던 커피맨은 '선생님 수업 방식에 대해서 월권행위하지 마라, 우리 모두는 선생님 수업방식이 좋아서 여기 오는 거다'라며 언성을 높였다. (참고로 S 문화센터에는 '생활영어회화'가 있다. 전에 빨간 구두님이 회원들 말하게 시키지 말고 선생님만 말하게 하라는 불평을 사무실에 가서 무한반복하자, 사무실에서 이름 바꾸는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영어'에서 '생활영어회화'로 수업명이 바뀌었고 한동안은 수업명이 그녀의 컴플레인에 대한 합리적인 대답이 되었다.)
싸움은 말로 시작되었지만 점점 험악해졌다. 두 분 다 그동안 맺힌 게 많았는지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로에게 다가가 몸으로 밀어붙이기 일보직전이었다.
난 한 마디 해야 했다. "두 분! 나가서 싸우세요."
이러기를 10여 년이 넘었다. 빨간 구두도 커피맨도 웬만하면 결석이 없다. 이제 나름 멀찍이 떨어져 앉아 서로 조절한다. 이러다 언젠가 또 사건이 터지겠지. 하지만, 부상자가 나올지언정 사망자는 나오지 않을 거란 걸 난 경험상 안다. 두 분에게 S 문화센터는 이미 익숙한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어쩔 땐 빈 속에 커피가 두 잔이다. 이미 커피맨의 커피가 교탁에 있는데도 꼭 수업 중간에 저 뒤에서부터 또각거리며 모든 이의 주목을 받고 빨간 구두님은 앞으로 위풍당당하게 전진한다. 커피전달식이 꽤 인상적이다.
난 두 분 각각의 스토리를 좀 알고 있기에 어이없는 행동에 분노는 있을지언정 미움은 없다. 이분들은 S 문화센터와 함께 나이 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더 나이 들어갈 것이다. 나 또한 여기에서 10여 년 넘게 함께 웃고 울고 한 회원분들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기에 이곳을 떠나기가 쉽진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