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온전히 받아들일, 삼 세 번의 기회
흔히 아이를 낳아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 아이를 낳고 키워가는 과정에서 '아, 우리 부모도 나를 이렇게 키웠겠구나'하는 생각에 부모님의 하늘 같은 은혜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는 그 사랑을 아이 하나 낳고 깨닫고, 누구는 둘을 낳고 깨닫는다고 하던데, 난 무려 아이 셋을 낳고 나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어릴 적 난 엄마가 어려웠다. 감정적으로 여리고 소심했던 내가 감당하기엔 엄만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인정 한 번 받고 싶어, 선생님께 칭찬받은 그림을 들고 가도 엄만 그 안에서 부족한 점을 꼬집었다. "엄마니깐, 객관적으로 말해주는 거야."라는 원치 않는 조언까지 덧붙이며 말이다.
힘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만 '힘들다'는 딸의 토로를 '버텨'라는 말로 받아치고, 상처받았다는 딸의 울음을 '나도 힘들다'라는 말로 돌려보냈다. 내가 엄마에게 바란 건 따뜻한 공감과 위로 한 마디였는데, 엄만 유독 그 말들을 내뱉기 낯간지러워했다.
엄마의 사랑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의 마음을 오해하며, 꽤 오랜 기간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당시 엄마에 대한 나의 감정은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사랑하고 미워했다. 몸은 매일 커져갔지만, 마음은 어린 시절에 갇혀 조금도 크지 않았다. 상처받을 거 알면서도 엄마의 인정과 애정을 받고 싶어 그 곁을 맴돌았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상처받고, 또 기대하고의 반복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혼란형 불안정애착의 어른으로 컸다는 걸 말이다.
'무슨 엄마가 이래'
딸이 출산을 하면, 보통 남편과 친정엄마가 그 곁을 지킨다고 하던데, 두 딸을 낳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옆에 있던 건 남편과 시부모님이었다. 엄만 그때도 일을 하다 사위에게 출산 소식을 전해 듣고, 마치 지인의 병문안 일정을 잡듯 차분하게 스케줄을 확인했다.
딸 둘을 키우면서도 '엄만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몇 번씩 스쳐 지나갔다. 같은 모녀 사이인데,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과 엄마가 날 대하는 마음이 너무나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먹고살기 바빠, 내가 언제 걷고, 말했는지, 나를 키우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의 20년 육아시절은 '나는 순했고, 동생은 까다로웠다'로 퉁쳐졌다. 엄마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냥 다름 자체로 받아들이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 셋을 낳고 키우다 보니, 어린 시절 내 서운함에 가려져있던 엄마의 어쩔 수 없던 상황이 헤아려졌다.
자매 싸움에 개입해 공평하게 중재를 해줘도, 아이들은 자신을 먼저 안아주지 않은 엄마에게 서운함을 내비쳤다. 똑같이 반으로 잘라 간식을 나눠줘도 아이들 눈에는 언니의 것이, 동생의 것이 더 커 보이는 편애로 비쳤다. 엄마가 제 아무리 발을 동동거려도, 모든 아이들의 니즈를 다 충족시키긴 역부족이었다. 자식에게 사랑만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과는 달리, 양육환경이라는 건 자식에게 사랑 플러스 서운함도 주는 구조였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선, '이건 기둥이요'하고 전체를 잘못 유추했던 것처럼, 어린 시절에 쌓인 서운함은 대부분 편향된 시선에서 바라본 왜곡이었다. 전체 10을 보지 못하고, 내 눈에만 보였던 1을 가지고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섣부르게 판단한 것이다.
역지사지라고 했던가. 내가 아이들에게 서운함을 살수록, 엄마가 자주 떠올랐다. 초, 중, 고 입학식, 졸업식에 오지 못 한 엄마, 소풍날마다 따뜻한 도시락이 아닌, 김밥 사 먹을 돈 2천 원을 쥐어주던 엄마. 그땐 엄마의 부재와 소홀함으로 서운했던 내 감정만 보였었는데,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보니, 내가 학교에 있던 시간 동안, 생계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던 엄마의 모습도 함께 그려졌다. 그리고 엄마의 삶도 다시 보였다.
어릴 땐 엄마가 엄하고, 무서워서 크게만 보였는데, 생각해 보니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24살에 엄마가 됐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어린 나이에, 자식새끼 잘 키워보겠다고 음료 영업, 방판, 급식실 조리사, 피부관리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아왔던 거였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그 시절 엄마의 두려움이 이제 내 눈에도 보였다. 사는 게 전쟁 같았다는 엄마의 말이 진심으로 마음에 와닿았다.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엄마에게 품어왔던 서운한 감정들은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아주 하찮은 것들이었다.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아이를 낳아봐야, 아이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 더 나아가 타인의 마음까지 종합적으로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첫째 때도, 둘째 때도 깨닫지 못했던 그 이치를, 셋째를 낳은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엄마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언행들로 가끔씩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 말들에 상처받거나,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진 않는다. 예전엔 엄마를 떠올리면 애증의 감정이 들었다면, 지금은 사랑과 감사함으로 온몸과 마음이 충만해진다.
어쩌면 삼신할매는 내가 먼 훗날 엄마의 영정사진 앞에서 울며불며 후회하지 않도록, 아이를 통해 엄마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세 번의 기회를 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