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친구 해줘
이탈리아 친구 나딜이 전 연인에 대해 얘기하며 한숨을 깊이 쉬었다.
자신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전 연인이지만 여전히 그가 좋고, 이탈리아를 곧 가게 되는데 그를 또 만날지 말지 고민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발레히는 말했다.
“그가 너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에게 자그마한 관심도 주지 마. 괜찮아. 그냥 다른 사람 찾아. 세 번 시도해 봤는데, 그가 반응이 없다면 바로 뒤돌아. 내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쓸 필요가 없어. 세상에 사람은 많아.”
나딜과 발레히의 대화를 하는 동안
속으로 ‘맞아, 너무나도 좋았던 스페인 여행이었지만 이제 다시는 관심 있는 남자를 보러 여행을 가진 말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파란 펜을 들었다.
a4 용지를 꺼내 칸을 나누고 하루 하루 하면 좋을 일들을 정리했다.
방 청소하기, 헬스장 가기, 프랑스어 공부, 친구 만나기, 요리해 먹기, 일기 쓰기
그날 곧장 꼬메디 광장에서 5분 정도 거리의 헬스장을 등록했다.
그리고 어학원이 끝나면 헬스장으로 향했다.
폭식보다는 건강함으로 마음의 허기짐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평소보다 늦은 저녁 시간대에 헬스장을 찾았다.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지만 넉살 좋은 프랑스인들은 같은 기구를 쓰고 싶을 때 서로 번갈아 가며 운동을 해서 운동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등 운동을 하러 기구 주위를 맴돌고 있는데
한 흑인 남성이 "번갈아 가며 운동할래?"하고 물어보았고 나는 '그래! 고마워."하고 대답했다.
등 운동이 끝나고 '천국의 계단'으로 향했다. 열심히 계단을 오르며 땀을 흘리고 있는데, 아까 봤던 흑인 남성이 나에게 다가왔다.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운동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의 눈이 내쪽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부담스러움에 운동을 빨리 끝냈다.
기구에서 내려오자, 그는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친구가 되고 싶어. 남자친구 있니?"
"남자친구는 없지만 지금은 그런 로맨틱한 관계는 원하지 않아."
"나는 그저 너에 대해 좀 알고 싶을 뿐이야."
친구가 되고 싶다면서 남자친구의 유무를 묻는 게 이상했지만 친구가 되고 싶다길래 그렇게 연락처를 교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헤이, 잘 지내?' 하는 문자가 왔고 밤에는 전화가 왔다. sns알람은 꺼놓고 있어서 문자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잠에 들기 직전의 전화음은 아주 선명해서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문자에 답장을 하자, 곧장 전화가 걸려왔다. 점심을 같이 먹자며 자신이 차로 데리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주소를 보내줘"
우리는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그 친구는 바로 일을 가야 했기에 그의 차 앞으로 배웅을 해주러 갔다. 차에 다다르자 그는 말했다.
"나 네가 좋아. 만나는 거 시도라도 하면 안 되겠니?"
"응, 안 돼. 나는 남자친구 만들 생각 없어"
완곡하게 거절을 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문자가 왔다.
"내가 마음을 언짢게 했다면 미안해. 너를 매력 있다고 말해서 네가 떠날까 봐 걱정 돼. 그렇지만 스트레스 없이 일을 시작하고 싶어"
"괜찮아. 이것만 확실하게 하면 돼. 난 절대 로맨틱한 관계를 원하지 않아. 좋은 마음 상태로 네가 일하길 바랄게."
오후 9시쯤 새로운 문자가 왔다.
"예쁜 눈을 바라보던 순간이 그리워"
"하하 고마워, 잘 자."
답장을 확인한 그는 그날밤 전화를 세 번이나 했다. 당연히 받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그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내가 그의 심장을 가져갔단다.
이미 친구밖에 안 된다고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무리수를 던지는 그의 행동에 신물이 났다.
"너를 친구로도 못 만날 것 같아. 왜냐하면 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야. 미안해."하고 문자를 보냈다.
곧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 키보드를 두들겼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문자로 해."
다음 날이 밝았고, 안시행 버스를 탔다.
안시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너 지금 갔니?"
답변을 하기 싫었지만 그가 나의 거처도 알았기에 최대한 좋게 끝내고 싶어 '그렇다'라고 말했다.
"제발 나의 친구가 되어줘."
"정말 친구를 의미하는 거라면 알겠어."
버스를 타고 안시를 가는 동안 그에게서 내 얼굴이 나온 사진을 보내달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왔다.
"번복해서 미안한데 너랑은 정말 친구 못하겠다. 미안해."
그 후, 폭탄처럼 문자가 쏟아졌다.
'벗은 사진도 아닌데 왜 못 주냐, 이게 한국 사람들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냐, 나는 나를 스스로 물에 가뒀다. 친구가 죽은 걸 느낀다.'
이상한 소리를 잔뜩 늘어놨는데 이때부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 친구가 정상이 아니구나, 집 앞에 찾아오면 어떻게 하지?'
'외국에서 혼자 사는데 건장한 흑인 남성이 집 앞에 찾아온다면?'
갑작스럽게 정말 불안해졌고, 비단 망설임 없이 북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나저나 나는 북한에서 왔고, 이건 진짜야. 네가 알아야 해."
"너는 너희 나라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걸 보여줬어"
"그래, 나는 두 번의 기회는 주지 않아. 여태까지 충분했어. 만약 네가 어떤 메시지라도 또 보낸다면, 다른 남자가 답을 해줄 거야. 내가 너를 용서해 줄 테니 그냥 너의 삶을 살아."
"그럼 내가 여태 남자랑 대화를 한 거니? 나쁜 사람아."
"다른 남자라는 건 다른 의미야. 나 지금 진지해. 이게 내 마지막 응답이야."
내 마지막 응답에 대해 욕을 남기고 떠난 그. 나는 그를 차단하고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친구들에게 나의 상황을 공유했다.
'몽펠리에'에서 나고 자란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마 아무것도 안 하고 다른 사람으로 관심을 돌릴 거야.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지만 그가 너의 집 주변에 보이게 된다면 우리에게 전화해. 같이 방법을 찾으면 돼. 만약에 너무 위험하다면 함께 경찰서에 가자. 그래서 안시에서 언제 다시 돌아와?"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버스 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무서움과 불안의 감정들도 점점 흘러내렸다.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이곳에서 만난 인연들에게 알게 모르게 스스로 선을 긋고 있었는데 소중한 인연이니 더욱 신경 써야겠다고, 동시에 낯선 이들에게 너무 친절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구글맵을 켜서 친구들이 먼저 가 있는 숙소로 이동했다. 호텔에 도착하고 방문을 열자 아무렇지 않게 반겨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꿈같았다.
다음 날, 다시 그 메시지 창을 보자 그가 보냈던 자신의 사진들이 다 삭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프로필 사진까지.
이후에 헬스장에서 또 말을 걸어온 남성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북한에서 왔냐며 농담을 던졌는데, '비밀'이라고 답했다.
그는 김정은 부부의 사진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더니, 다신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