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한 밤의 방 안에 천천히 풀어둘 것
말하기가 어려워 글을 적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사이 혀끝에 머무른 말이 도망쳤다. 그때부터였다. 모든 말들을 펜으로 옮겨 적기 시작한 건. 손끝은 그걸 놓치지 않고 가장 신중한 방식으로 마음을 붙잡았다.
밤이었다.
창문은 닫혀 있지만 창 밖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는 창틀을 쉬이 넘어 내 방 침대 위까지 기어들어왔다. 서랍장 위 조명이 종이를 덮고 있었다. 비어있는 하얀 종이 한 장. 나는 오른손으로 펜을 들었다. 코끝을 스치는 잉크 냄새가 익숙했다. 처음엔 짧은 문장 하나로 시작됐다. 그다음 줄엔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그 아래로 공백의 시간이 놓여있다. 자음과 모음이 어설프게 이어졌다. 속이 비어 있는 글자들이 종이 위로 삐뚤빼뚤.
어떤 단어는 제대로 닿지 않았고, 어떤 문장은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숨처럼 긴 침묵이 생긴다. 나는 그 침묵을 말하고 있다는 기분으로 계속 적어 나갔다. 잉크는 고르지 않은 속도로 스며든다. 몇몇 글자는 굳게 번졌다. 이 글자들은 분명 나인데. 그걸 보는 건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썼다. 의심과 반복. 주저와 고백이 한 줄씩 늘어났다.
하얀 종이에 눌려 있던 파란 글자들이 조금씩 몸을 풀고 공기 속으로 가볍게 떠올랐다. 잉크 냄새가 잦아들수록 내 방 안은 점점 파랗게 물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불 꺼진 거리. 희미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 침대 위를 기어오르던 자동차의 붉은 미등. 방 안과 바깥 사이에는 얇고 투명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경계 위로 파란 글자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 방 창문이 조금만 더 허술했더라면 창을 넘어 누군가의 어깨에 내려앉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그 장면을 상상했다. 내가 수놓은 단어 하나가 말없이 창밖을 걷는 당신의 귀를 간지럽히는 장면.
여전히 밤이었다.
창문은 빈틈없이 닫혀있었다. 그게 꼭 '그런 건 꿈도 꾸지 말 것!'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웃음이 났다. 허공에 떠오른 글자들이 하나씩 부풀었다. 부푼 것들은 내 방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이내 벽을 타고 물처럼 흘렀다. 침대 머리맡부터 바닥. 벽지. 커튼 가장자리까지. 내 방 전체가 파랗게 젖어갔다. 그 모든 건 이제 마른 종이 위에만 남아있는데. 벽에 붙여놓은 그림이 조금 기울었고 카펫 끄트머리는 어쩐지 한쪽으로 쓸려있었다. 조명은 다시 희고, 방 안엔 더 이상 파란 냄새도 없었다. 내 잠옷 바지 밑단엔 보이지 않는 소금기가 말라붙은 것 같은데.
내 방은 종종 바다가 된다.
다음엔 꼭
물장구를 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