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무빙워크에 함께 오르다
"나 훈련소 가"
만난 지 한 달이나 지났을까. 내 손을 마주 잡은 도현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군대라고? (내 귀는 이미 '군대'라고 듣고 있었다) 그거 20대 초반에나 하는 거 아니었어? 멀쩡하게 직장 다니다 군대라니.(훈련소라고... 쯧) 나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 어쩌려고(한 달인데 무슨 소리를)' 한꺼번에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다.
사실 그는 병역특례로 근무 중이었기에, 고작 한 달 훈련소 맛을 보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나중에 들어보니 일반 병사보다 나이 지긋한 병특 병사들은 훈련 강도도 낮다고 한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의 헤어짐은 사랑에 말랑해진 내 가슴이 쿵 내려앉기에 충분했다. 매일 얼굴 보던 사람이 사라진다니! 연락도 못한다니!
그래서였다. 정말 아무 뜻 없이, 아빠가 '그 녀석 고생하러 가는데 밥이라도 한 끼 사주겠다'길래 그대로 전했다. 아마도 맑게 웃으면서. 거절하기 어려울 만큼 해맑게.
내 돈으로 비싼 밥을 사주기엔 에이전시 월급은 박봉이었기 때문에, 아빠 지갑으로 도현에게 맛있는 거 먹이고 싶어서, 내가 좋아하는 '연희동 수빈'의 한식 한 상에 순간 눈이 돌아가서. 그래서 예비 사위를 부모님께 처음 선보이는 그런 불편한 자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딸이 어떤 녀석을 만나는지 몹시 궁금했던 부모님의 속뜻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친구의 부모를 만나는 그의 부담스러운 심정도, 나중에 도현의 입을 통해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우리를 실은 택시가 '수빈'에 가까워지자 나는 마냥 설레고 있었다. 부모님은 먼저 도착했다 들었다. '이미 시켜놓으셨겠지?' 넓은 상에 놓여있을 반찬들이 이미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감칠맛 돋우는 식전 검은깨죽, 유자향이 감도는 연근 샐러드, 적당히 건조해 양념에 졸여낸 묵이 차례로 퐁 퐁 떠올랐다. 메인은 뭐 시키셨으려나? 간장게장이랑 떡갈비 다 시켰으면 좋겠다' 도현에게 빨리 먹여주고 싶었다.
우리에게 안내된 방은 2층의 한 좌식 방이었다. 문이 열리자 엄마 아빠의 눈이 일제히 도현에게 향했다. 부모님은 흥미롭고 흡족하게 그를 바라봤고, 도현도 어색하기는커녕 싹싹하게 인사하고 씩씩하게 자리에 앉았다. 몇 마디 섞지도 않았는데, 아빠가 대뜸 질문을 하신다.
"자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연대 생물학 박사와 이대 생물학 교수를 거쳐 한 기관의 기관장으로 일하고 계시던 아빠의 입에서 나올 법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흡사 면접자리 같았지만 도현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미리 준비라도 하고 온 양 술술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빠는 표정을 보니 이미 흡족해하고 계셨다. '너는 내 사위다'라는 표정이었다. 엄마는 조용히 웃으며 앉아계시고. 도현은 할 일을 다한 양 그제야 한 술 뜨기 시작했다.
종종 생각했다. 내가 정말 몰랐던 건지, 모른 척했던 건지, 아니면 뻔뻔하게 판을 깔아놓은 건지. 이 야무진 남자를 코라도 꿰맬 심산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나는 정말 가볍게만 생각했다. 부모님이 그냥 딸 친구에게 밥 사주고 싶구나 정도로 말이다. 의도였든 의도가 아니었든 이 만남은 아마도 우리 부모님에게는 어떤 확신을 준 것 같다. 제대로 된 놈이군, 내지는 저 놈이면 시집을 보내도 되겠군 같은 확신. 후에 두 분은 나의 연애에 이래라저래라 하진 않았지만, 그런 확신은 알게 모르게 나에게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물어본 적은 없지만 도현에게는 '부모님까지 만났으니 넌 어디 못 간다'는 메시지가 되었을 거다. 후에 도현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만나는 자리마다 '당황스럽게도 만난 지 한 달 만에 부모님 앞에 앉혀놓은 여자친구' 이야기를 했으니 말이다.
도현을 만나기 전까지 결혼할 사람은 어떻게 알아볼지 궁금했다.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상상을 하며 쓸데없는 불안의 덩어리까지 키워댔다. 아니 이미 놓쳐버린 건 아닐지, 아니면 미래의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랑 벌써 결혼을 했다면 나는 평생 혼자 살아야 하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현을 만나고 보니, 온 우주가 등을 떠밀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옆 건물로 내가 파견을 나가고, 그가 친구의 일을 돕고, 피부가 좋은 여자가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내 번호가 전해지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각설탕'을 보며 눈물을 보이고, 소개팅 일주일 후에 연인이 되고, 만난 지 한 달 만에 부모님을 만났다. 모든 것이 맞물려 자연스럽게 한 방향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그의 운명과 나의 운명이 하나의 무빙워크 위에 올라탄 듯했다. 우리는 운명이 이끄는 대로 함께 그 위에 있을 뿐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머리를 짧게 민 채 훈련소로 떠났다. 고작 한 달이지만, 파릇하게 연애를 시작한 우리에게는 2년 못지않게 슬픈 이별이었다. 나는 매일 편지를 썼다.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손 편지는 아니었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프린트해서 전달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릴 적부터 글쓰기를 좋아했고, 뭐라도 끄적이는 게 내 취미생활이었으니, 내 쓰기 할당량을 거기다가 푼 셈이다.
그립던 어느 날, 집으로 한아름 꽃이 바구니에 든 채 배달된다. 도현이 보낸 꽃이었다. 수신인은 내가 아니라 우리 엄마였다. "윤진이를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가 적힌 꽃바구니에 엄마는 놀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친구로부터 받은 꽃이 처음은 아니지만 우리 엄마를 공략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제까지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을 때마다 내 가슴에는 '부담'부터 솟았는데, 처음으로 '감동'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는 아마 대단한 전략가이거나, 나에 대한 파악이 빠른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다.
여기까지 쓰고, 주방 옆 식탁에 앉아 노트에 뭔가를 적고 계시던 아빠에게 다가가 앉았다. 마침 내 눈앞에 계시니 절호의 기회였다. (다음주면 한국으로 가신다)
"아빠, 그날 기억나? 이서방 처음 만난 날 말이야. 훈련소 가기 전에, 수빈에서 봤었잖아. 그때 왜 밥 사준다고 했어?"
"사위 삼으려고 그랬지"
"한번 보지도 못한 사람을? 갑자기?"
"그전에 아파트 앞에서 한번 봤어. 인사하는데 똘똘하게 생겼더라고. 저놈 사위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지"
이럴 수가. 이제야 그날의 진실을 알다니. 온 우주가 이끈 줄 알았더니, 사실 무빙워크의 속도를 높인 건 아빠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