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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 Nov 27. 2024

장차 CEO가 될 남자를 만나다

내 눈이 그를 알아보았다


* 이름은 가명입니다. 


이름이 ‘도현’이라던 이 남자, 목소리에 구김이 없었다. 호탕했다. 맑았다. 내가 '말'을 탄다고 하자 '더 호감이 간다'고 대놓고 말하는 솔직함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 사람의 밝은 에너지가 전화를 뚫고 나한테도 닿는 듯했다.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건 없었다. 주선해 준 친구가 전해준 정보라고는 옆 사무실에 근무한다는 것과, 도움받은 게 있어서 약속한 소개팅에 내가 생각났다는 것. 그 이유가 '피부가 좋은 여자'가 좋다고 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와의 짧은 통화에서 알게 된 건, 이 사람의 에너지가 나의 낯가림을 녹여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첫 통화는 처음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유쾌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미술관이...... 요?"
이 무슨 뚱딴지같은 첫 소개팅 장소인가. 미대 나온 사람은 미술관을 좋아하는 줄 알았나 보다. 미술관에 같이 가면 해설이라도 해줘야 하나? 나는 아는 게 없는데. 심지어 가만히 벽에 붙어있는 그림을 보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다. 화가가 알아서 그린걸, 후대에 남은 우리가 잘 해석해 본다 한들 그게 얼마나 정확할까. 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게 평소 내가 가진 생각인데, 그대로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싫다'고 했다. 영화나 보자고. 여기서 첫 번째 오해가 발생한다. 그가 나에 대해 품은 오해가.


소개팅날 본 영화는 말에게 각설탕을 먹이는 장면으로 유명했던 <각설탕>이었다. 주인공 임수정이 자신의 분신과도 같던 말 한 마리와 원치 않은 이별을 하고, 2년 여 후 우연히 재회하며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에 나는 굵은 눈물을 주르륵 쏟아냈다.
사실 나는 평소에 눈물샘이 아주 건조한 편이고, 드라마에서 슬픈 장면이 나와도 우는 법이 없다. 원래 의심도 많기도 하지만, 연출된 장면을 '연출'로만 보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모두가 짠 것처럼 눈물을 찍어낼 때도 '아, 이거 울어야 하는 장면인데'부담을 느끼곤 했다. 아무리 눈을 비벼봐도 마른 샘물에서 물이 솟아날 리가 없었다.
단, 유일하게 동물이 나올 때만 몰입했다. 연출이 아닌 것 같아서. 나를 속이려는 게 아닌 듯해서. 그래서 이날, 나는 울었다. 후에 남편이 이야기하기를 나를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청순가련한 여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게다가 마침 이날 입은 차림새도 평소에는 입지도 않던 감색 치마와 블라우스에 다소곳한 구두였으니 이 날 보인 눈물과 일맥상통했다 볼 수 있다. 여하튼 남편은 그렇게 오해를 해버렸고, 우리가 서로를 잘 알기도 전에 연인이 되어 버렸으니 결과적으로 이날 고른 영화가 탁월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우린 딱 7일 후 사귀기 시작했다)
 
적당히 다소곳함을 유지하던 어느 날이었다. 이대 정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한 카페 창가 자리에 그와 나란히 앉았다. 뭔가 결심하고 나온 듯,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날 앞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 도현을
 둘러싼 공기는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나 하고 싶은 게 있어” 도현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말일까. 그는 호기심 가득했을 내 눈을 들여다보며 풀어서 설명했다. 창업을 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친구와 둘이 할 거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둘 거라고. 병역특례로 들어가 멀쩡하게 다니던 SK텔레콤을, 남들 다 들어가고 싶어 하던 대기업을 나오겠다고 말이다. 이제 연인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풋풋하게 사랑을 시작하던 나에게 미리 이야기한 건 도망가려면 지금 가라는 뜻이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진지한 목소리가, 선명한 눈빛이 마냥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밖은 꽤 어두웠고, 늦은 시간이라 거리에 시끄러운 사람도 없었으며, 창가에 나란히 앉아 '분위기'라는 것도 좀 잡혀 있던 데다가, 순전히 카페의 조명이 그의 눈을 빛나게 했던 것 같지만, 나는 그 순간 운명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멋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저렇게 단호하게 하고 싶은 게 있었던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으니 자연스럽게 미대를 준비했고, 대학을 가야 한다니 갔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공예과가 아니라, 엄마가 마음대로 집어넣었던 특차 서류에 이끌려 덕성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과로. 공예과보다 밥 벌어먹고 살기 좋다는 이유였다. 특차가 되면 다른 학교를 쓸 수 없었음에도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던 건, 단 한 번도 3시간 완성을 해본 적이 없기에 당연히 떨어질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초월적인 힘이 작동을 한 건지 평소 4시간도 버거워하던 내 손은 그림을 2시간 45분 만에 완성해버렸다. 그리고 그날 내가 그린 그림은 '미대입시'라는 미술 잡지에 실렸다. 
그 뒤 대학원을 진학했으나, 그 또한 아빠의 권유로 시작된 거였다. 마침 4년 내내 시각디자인에 별다른 흥미를 붙이지 못한 데다가, 이대로 디자이너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부모가 억지로 시키는 건 좋지 않다는 교훈을 얻었다) 지금 돌아보니 누가 시키는 걸 하기 싫어하는 성격인데, 그 당시 분위기는 디자이너란 누군가가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박봉의 노동자였을 뿐이니까. 그래서 대학원은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였던 셈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언제든 다시 한걸음 나아가야 할 때가 온다. 그때의 나에게는 취업이 그랬고, 이때도 나는 도피를 선택한다. 친구 둘이 먼저 들어간 디자인 에이전시에 문을 두드리고, 그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여기는 영어 점수가 필요 없었으니까. 그거면 되었으니까. 

나는 도현의 눈에서 내가 가지지 못한 용기를 읽었다. 하고 싶은 게 있다는데, 나에게는 없는 걸 가지고 있다는데, 내가 도와주고 싶어졌다. 나는 못하니까 너라도 하라고. 나는 사모님 할 테니, 너는 CEO 하라고. 그게 시작이었다. 
 

사실 도현이 아무런 대책도, 뜬금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으면 나는 불안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현은 어딘가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평소에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나를 최우선으로 두고 질척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좋았다.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대기업에 갔으니 한 직장에서 늙을 때까지 뼈를 묻어야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마음에 들었다.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창업을 위해 돈을 착실히 모으는 사람이어서, 생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실행을 하는 부분까지 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본능적으로 CEO의 자질을 읽어냈을 수도 있겠다. 
게다가 도현은
 경제에도 밝았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 주변에는 3천만 원을 투자해 전세 낀 아파트를 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에게 20대 중반은 한창 노는데 빠질 나이었으나, 그에게 그 나이는 적은 돈을 불릴 수 있는 생각과 기반이 있는 나이었다. 부모님에게 늘 '아껴라'라는 이야기만 듣던 내게, 그의 그런 점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날, 나는 마음먹는다. 이 남자랑 같이 잘 살아봐야겠다고. CEO가 될 그의 여정을 함께해보고 싶다고. 그 고난의 여정을 기꺼이 뛰어들어 봐야겠다고. 물론 
17년이나 이어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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