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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Jun 23. 2023

사랑하지만 함께 살긴 어려워

나무와 꽃, 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나는 곰손이다. 손이 무척 무디다는 뜻이다. 손으로 무언가 만들거나 키워내는 걸 정말 못한다. 한 마디로 솜씨 없는 사람이다. 그림도 못 그리고 글씨도 달필이 아니다. 하다못해 가위질이나 칼질도 잘 못한다. 자 대고 선 긋는 것조차도 뭔가 어색하다. 사진이야 당연히 못 찍는데, 가장 심각한 건 수평조차 못 맞춘다는 것이다. 요리, 당연히 잘할 리가 없다. 라면 물이나 겨우 맞추고 계란 프라이나 부칠 줄 아는 정도다. 당연히 동물이나 식물 기르는 일에도 무척 서툴다. 남의 집 강아지, 골목이나 공원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를 보면 반가워 어쩔 줄 모르지만, 정작 길러볼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무와 꽃, 풀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선뜻 길러볼 생각을 해보진 못했다.


아니다. 사실 동물은 아니라도 식물은 길러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러나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식물 관련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구매 이벤트로 씨앗을 몇 번 받은 적이 있는데, 작은 화분에 흙을 담고 씨앗을 심어 물을 주었지만 싹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꽃 모종을 사왔지만, 곧 진딧물이 하얗게 끼어 애처롭게 죽고 말았다. 나를 주인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나보다 부지런하고 살뜰한 손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면 무럭무럭 향기롭고 생생하게 자랐을 그 씨앗과 식물들이 애처롭고 안타까워서, 몇 번의 실패를 끝으로 이제는 더 시도하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아니, 사랑하기에 함께 살기를 기꺼이 포기하는 마음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식물을 좋아한다. 길을 걷다 문득 가로수를 올려다보고는 감탄한다. 모든 나무들은 어쩜 저렇게 묵묵하고 굳셀까.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은 어쩜 저렇게 연하면서도 끈질기고 아름다울까.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잎과 열매를 내고, 이내 떨어뜨리고, 빈 가지로 남아 찬바람을 견디고, 다시 겨울눈을 틔우는 모습이 항상 경이롭다.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라비틀어져 숨을 거둔 나무도, 또는 비바람에 부러지고 꺾여 일부만 남은 둥치조차도 아름답다. 어쩜 저렇게 세월과 풍파를 아낌없이, 조용히 받아들였을까. 항상 생각한다.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무 같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다. 물과 햇빛과 흙만으로 만족하며 묵묵히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나무처럼, 그렇게 평생을 살고 싶다.


소설가 한강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의 소설들이 동물성보다는 식물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설 속 캐릭터들이 현실의 폭압에 묵묵히 저항하거나 견디는 모습, 전반적으로 우아하고 섬세하며 끈질긴 태도와 분위기를 가진 아름다운 문장들과 주제의식, 그런 것들이 식물의 특성과 비슷하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꺾이면서도,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잎과 열매를 떨구면서도 해를 넘기면 다시 싹을 틔우고야 마는, 부드러움 속의 강인함, 그같은 식물의 생명력 또한, 한강의 작품들에서 엿볼 수 있는 개성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중에는 식물의 특성을 직접 모티프로 택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채식주의자>나 <내 여자의 열매> 같은 것들. 단편인 '노랑무늬영원'에서도 햇빛을 받은 나뭇잎의 이미지가 무척 아름답고 중요하게 묘사된다.

     

그래서 식물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아한다. 뚜벅이라 전국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녀보진 못했지만, 겁이 많고 허약해 등산을 즐겨 하지도 못하지만, 식물원이나 숲, 나무가 많은 공원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공원에 식물원이나 온실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 반드시 가본다. 창경궁의 유리 온실, 어린이대공원의 식물원은 자주 가보는 곳이다. 축축하고 따뜻한 공기 속에서 머리 위와 사방을 가득 메운 무수한 푸른 잎들, 이름 모를 꽃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홍릉수목원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키가 커다란 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걷는 것을, 흙 밟히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표지판들에서 모르는 식물들의 이름을 읽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계속 식물 관련 책을 읽고 도감을 찾아봐도, 식물은 너무나도 그 종류가 많고 내 머리는 나빠서, 도통 그 이름과 겉모습을 짝지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음 꽃검색이나 식물 이름 검색 앱을 자주 사용한다. 길을 걷다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식물, 내가 잘 모르는 식물을 발견하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다음 꽃검색을 하거나 식물 이름 검색 앱에서 이름과 특성을 찾아본다. 그렇게 알게 된 식물이 많다. 김춘수의 시 '꽃'의 예를 굳이 들지 않아도, 존재의 이름을 알고 불러주어야 그것이 나에게로 다가올 수 있다고, 내게로 와 어떤 의미가 된다고 믿는다. 좋아하기 때문에 자꾸만 궁금하고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식물 관련 책들도 자주 구해 읽는다. 최근까지 가장 좋아하고 자주 읽어온 책은 코난북스의 <아무튼> 시리즈 중 한권인 임이랑의 <아무튼, 식물>이다. 소위 식집사이자 식물덕후인 밴드 디어클라우드의 멤버 임이랑이, 식물을 키우면서 겪은 일들과 느끼는 감정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풀어낸 에세이집이다. 분량은 적지만 진솔하고 아름다우며 담백한 식물 사랑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식물세밀화가로 유명한 이소영의 책들도 무척 좋다. <식물의 책>, <식물과 나>, <식물 산책>은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삽화가 인상적인 데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식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빼곡하게 담아내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나무박사이자 칼럼니스트 고규홍이 나무에 관련된 시들을 모은 <나무가 말하였네> 시리즈도,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나무를 노래한 시인이 이렇게 많았나 새삼 감탄하게 된다.


작년 6월경에 난생 처음으로, 직장 동기와 경기도 가평의 아침고요수목원에 갔다.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뚜벅이라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오래 망설이던 차에, 운전을 할 줄 아는 직장 동기가 내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함께 가주었다. 크고 아름다운 수목원이었다. 서울의 홍릉수목원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지만, 아침고요수목원은 그보다 훨씬 커서, 너무나도 다양한 식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침 날이 무척 맑고 밝아서 나뭇잎들이 한층 선명한 푸른색으로 빛났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수한 나무들, 때마침 흐드러진 푸르고 붉은 수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산뜻했는지 모른다. 주말이긴 하지만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저마다 사진을 찍고 산책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볕이 금새 따가워졌고 내부가 워낙 넓어 구석구석을 오래 걸어다니진 못했지만, 푸르고 붉고 하얀 것들, 고요하고 화사하고 상쾌한 것들을 실컷 볼 수 있었다. 멋진 시간이었다.   


나는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고 땀도 많이, 자주 흘린다. 그래서 어려서는 여름이 무척 싫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습하고 더워져서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여름이 좋아진다. 꽃과 나무가 가장 생생하고 산뜻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 때문에 일찌감치 꽃과 잎을 내는 식물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아리지만, 그럼에도 묵묵하게 변화하는 환경을 견디며 제 할일을 차례로 해나가는 식물들이 너무나도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이따금 쏟아지는 빗줄기에 더욱 푸르고 붉고 새하얘지는 잎들이, 꽃들이, 줄기가, 그들이 보여주는 끈질긴 생명력이 무척 경이롭다. 여름날 새벽 또는 이른 아침에,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달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때문이다. 길을 달리며 길가에 선 푸른 가로수들을 스쳐 지나갈 수 있어서. 나보다 일찍 일어나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 새벽 공기에 차분히 잠긴 나뭇잎들을 온몸으로 느끼는 게 좋아서.


여전히 손은 무디고 몸도 게을러, 당장 멋진 식집사가 되기를 꿈꾸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좀 더 공부하고 준비해서 언젠가는, 반려식물을 들여보고 싶다. 무엇이라도 좋다. 향이 풍부하고 식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허브여도 좋고, 튼튼하고 통통한 다육식물이어도 좋고, 소담하고 다정한 빛깔의 꽃이어도 좋다. 나는 어떤 식물이든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모든 식물이 저마다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아니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길러내고 싶다. 내 무디고 게으른 손에 맡겨진, 대견하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생명을, 아름답게 키워내고 싶다. 그가 한결같이 품고 있는 묵묵함과 단정함, 한없는 겸손함과 넉넉함으로부터 내 삶의 태도를 돌아보고, 꾸준하게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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