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틀맨's 토크
젠틀맨스 토크란, 위계가 존재하더라도 충돌은 피하고 싶은 관계에서, 서로의 생존을 해치지 않기 위해 정면 비판은 피하고 예의와 뉘앙스로만 소통하는 고도의 조직 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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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느렸고, 커피는 식은 지 오래였다.
김 상무의 손끝이 페이지 한쪽을 짚었다.
“만숑, 이거는 좀 애매하네. 보고서에선 확신이 있어야지. 보고하는 사람이 이렇게 중언부언 써버리면, 어떻게 이해하라는 거야?”
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김 상무가 가리키고 있던 그 페이지에 있는 내용은 이 부장이 직접 수정한 부분이었다.
이 부장은 시선을 내리지도, 들지도 않은 채 살짝 의자를 고쳐 앉았고, 초조하게 손등 위로 펜을 굴리기 시작했다.
“실무자가 감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 이게 위로 올라가면, 부끄러운 건 위가 되는 거니까. 만숑이 이 정도는 잘라줬어야지.”
책임은 내게로 떨어졌지만, 말은 조금 더 높은 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김 상무는 페이지를 넘기며 덧붙였다.
“이건 만숑이 더 예민했어야 돼. 실무는 그게 일이야.”
그 말이 끝났을 때, 이 부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 앞으론 제가 같이 정리하겠습니다. 흐름이 또렷하게 잡히도록 옆에서 좀 보죠.”
김 상무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부탁 좀 해요.”
묘하게 기분이 언짢아지는 짧은 말이었다. 김 상무의 커피잔을 든 손이 테이블을 한 번 톡 건드렸고,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날 오후, 며칠 전 내가 최 과장에게 요청했던 보고서 검토를 위해 최 과장, 박 대리와 함께 미팅을 가졌다.
“이 문장은 좀 위험해. 문맥 없이 이렇게 강조하면, 누가 만든 건지보다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물어보게 돼.”
나는 박 대리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다그쳤다. 박 대리는 작게 “네” 하고 고개를 숙였고, 옆에 앉은 최 과장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 같이 다시 볼게요.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박 대리를 사이에 두고, 나와 최 과장 사이에서는 또 하나의 젠틀맨’s 토크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