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8화] 냉소, 가장 세련된 회피의 기술

by 만숑의 직장생활

1.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회의.

회의를 하다 보면 꼭 한 명씩 있다. 말 안 하고, 표정도 안 바뀌고, 그냥 분위기 흐르듯 앉아 있는 사람.

의견을 물으면 늘 비슷한 말이 돌아온다.


“다 장단점이 있죠.”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A팀에서 판단해야 하는 부분 아닌가요?”

겉으로 보기엔 신중하고, 중립적이고, 이성적이다. 하지만 그 말들엔 공통점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는 것.

아무 의견도 내지 않으면서, 틀릴 일도 없다. 감정도 섞지 않으니 미성숙해 보이지도 않는다. 책임도 지지 않으니 손해 볼 일도 없다. 그래서 점점, 모두가 따라 하기 시작한다.

“어설프게 말했다가 괜히 책임만 질 수도 있으니...”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말하겠지...”


그리고 그렇게, 아무도 말하지 않는 회의가 시작된다.

2. 냉소는 판단을 유보하는 가장 세련된 방식.

이 상태가 바로 ‘냉소’다.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내심 모든 가능성을 가볍게 비웃고 있다.


내가 해봤는데, 어차피 안 될 거야.”
“그딴 거 해봐야 뭐가 크게 변하겠냐.”


말은 안 하지만, 표정과 태도에 다 묻어난다.

냉소의 무서운 점은, 겉으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지만, 사실상 모든 것을 무력화한다는 것.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싸우는 것도 아니니까 겉으로는 조용하다. 하지만 그 안에선 아무 의지도, 논의도, 결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3. 냉소는 부정보다 더 나쁘다.

부정은 적어도 말은 한다.


“이건 아니다.”
“이 방향은 틀렸다.”
“이건 이렇게 바꿔야 한다.”

그 말 위에서라도 논쟁이 일어나고, 그 논쟁이 때로는 변화를 만든다.

냉소는 다르다.


애초에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고, 가능성을 상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침묵과 방관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모든 시도를 조용히 잠재운다.

그래서 냉소는 에너지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에너지를 흡수하는 상태다. 가만히 있는데, 회의 전체가 피로해지고 누구도 방향을 잡지 못하게 만든다.


4. 왜 사람들은 냉소에 기대는가.


왜 그렇게 되는 걸까. 사실 이유는 단순하다.


냉소는 안전하다.


무언가를 믿지 않으면 틀릴 일도, 책임질 일도 없다. 입장을 드러내지 않으면 비난도 피할 수 있다. 실망도, 실수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집단의 생존 방식일지도 모른다. 기회보다 리스크를 먼저 따지는 구조, 틀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회의 분위기, 결정보다 책임 추궁이 앞서는 보고 문화.


그런 환경에서는 사람들 대부분이 점점 ‘가장 합리적인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사실 그건 합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회피일 뿐이다.

5.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보고서만 바뀌고, 포맷만 달라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걸 다들 알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 틀렸다거나, 누가 무능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냉소의 장점은 '누구도 책임이 없다는 점' 이지만, 냉소의 진짜 대가는 '아무 결과도 없다는 점' 이다.

6. 소를 이기는 용기.


회의가 끝난 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오늘, 판단을 피한 건 아닐까?”
“이 회의가, 내가 책임지기 싫어서 조용히 덮인 건 아닐까?”

냉소는 날 보호해주지 않는다. 단지, 내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게 할 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서툴더라도, 완벽하지 않은 내 생각을 꺼내보려 한다. 모호하고 확신 없는 말이더라도 그게 지금 내 진심이라면, 그대로 한 마디쯤 남겨두기로 한다.

한 줄로 정리된 결론보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부딪히고, 엉켜보는 쪽이 나에겐 더 중요하다. 똑부러진 결론 대신, 그때그때 흔들리는 마음과 태도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다 알고 있다는 말보단 아직 잘 모르겠다는 고백이 내겐 더 솔직하니까.

틀리지 않기 위해 침묵하기보다, 조금 틀리더라도 그 안에서 배워가는 걸 택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냉소를 이기는 마음이 내 안에 조금씩 자라날지도 모르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17화] 프로페셔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