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인간 54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에 관해 이렇게 정의했다. ‘요컨대 거울, 그것은 유토피아이다. 장소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거울 안에서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있는 나를 본다. [거울의]표면 뒤에 가상적으로 열리는 비실제적 공간에 나는 저편 내가 없는 곳에 있다. 스스로에게 나 자신의 가시성을 부여하는 일종의 그림자, 그것은 내가 부재하는 곳에서 나 자신이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거울의 유토피아. 하지만 거울이 실제로 존재하는 한, 그리고 내가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그것이 일종의 재귀(Recursion) 효과를 지니는 한 그것은 헤테로토피아이다.’ 이렇듯 영원히 게토화 되지 않는 유토피아- 장소 없는 장소에서 우리는 순기능을 못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중력을 망각한다. 푸코가 주장한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가의 지독한 헤테로토피아만이 유토피아적 배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동시에 예술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기 위하여 검은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버릴 수 없다.
자신의 사랑이 빈집에 갇혔다- 했던 기형도 시인조차 빈 것의 슬픔을 메우는 일은 그의 생이 다 할 때까지 영원히 불가능할 거라 했다. 하지만 화가는 유토피아의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부재로부터 평범히 태어나지만 반드시 성장하려 그 거리를 가늠한다. 화가는 헤테로토피아로 걸어간다. 그러기 위해 그곳에 위치한 사건을 공허한 사건으로 바라보며 지나치지 않는다. 흡사 자신의 혈관에서 피어오른 검은 호수에 얼굴과 몸을 씻듯, 그것을 다양한 이유로 덮고 더 기억조차 않으려는 사람들과 달리 예술가는 만지고 맛을 느끼고 마주 보는 법을 익힌다. 그것은 시인처럼 하늘과 별을 읽는- 헤테로토피아를 가리키는 용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