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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본 자의 여유

마흔, 다시 그리다

by 글쓰는 디자이너


나는 미대를 졸업했다. 그럼에도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 한다. 완성된 그림 앞에서 나는 늘 작아졌다. 그 복잡한 디테일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린 것이다.

'나는 저렇게 못 할 거야. 저건 내게 너무 어려워.' 이렇게만 생각하고 타인의 그림을 훔쳐보기만 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하고 싶으면서도 시도초자 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무거운 죄책감이 올라왔다. 그 찝찝한 감정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큰 사물을 조각으로 나누어서 부분에서부터 시작했다. 작은 선을 그리고 그 위에 또 작은 선을 그리고.

그렇게 장미 하나가 탄생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림이 완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오롯이 나 혼자 그린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었네???'


그다음엔 손을 그리고 새와 해바라기를 그렸다.

'진짜 되는구나. 덩어리로 보고 작은 것부터 그리니 그려지는구나.'

여기까지는 미대를 준비하면서 그려본 것들이었다. 나름의 지식이 있었다.

그런데 어제는 사람을 그려보기로 했다.

살면서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는 사람 그리기.

동그라미로 몸을 나누고 그 안에서 하나씩 그리니 사람이 완성되었다.


'내가 사람을 그릴 수 있다고??? 내가??'



순간 깨달은 것 하나.

'아! 나는 이제까지 사람을 한 번도 그려볼 생각을 하지 않았구나' 그런데 잘하고 싶어 했고, 겁부터 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을 것을 왜 못한다고 단정 지었을까? 이런 사고방식으로 나 스스로를 얼마나 많이 가두어 두었을까?


미안하다. 나 자신아


이제부터는 해보지 않은 일에 '할 수 없다'는 생각부터 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해볼 거다.


해보면 알게 된다. 나의 가능성을.


이 가벼운, 홀가분한 기분은 무어일까?

아마도 '해본 자'의 여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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