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진되어 있을 때 하루를 탕진해 몸과 마음이 가난해졌을 때도 밤은 온다.
아침이 온다는 사실보다 때로 밤이 온다는 사실에 더 위안을 받는다.
밤은 뒤척일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울 수도, 잘 수도, 꼬박 샐 수도 있다.
밤은 잉여다. 선물이고 자유다.
-박연준/장석주,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자동차 소리,
길 걷는 사람들 목소리,
길고양이 울음소리,
플라타너스 잎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
이 온갖 파동들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또 아주 먼 곳 에서부터도 기어이 와 내 방의 창을 흔든다.
나는 무시하고 외면했고, 방은 계속 고요할 수 있었다.
모든 반대의 것들이 상쇄하여 결국에는 무가 되길 기다리면서 문득 쳐다본 창문에는 바깥 풍경에 겹친 내가 비치고 있었다.
어딘가 불편해 보였고, 싫었다.
창 안팎의 시공간이 뒤틀린 탓이라는 상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이제 두 곳의 시간은 다르게 흐를 것이니까.
혼돈 속에서도 고유의 속도를 내는 것은 내 심장뿐이었는데, 절대성을 띤 무언가를 가슴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순간 나는 대상자가 아닌 관찰자로 세상을 보는 것만 같았고, 조금 달라 보였다.
창 너머 그곳은 시간 지연이 발생한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창을 살짝이긴 해도 열어 두었는데도 여태 귀찮게 하던 바람이 비집고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멈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인지 모를 자유가 느껴졌다.
나에게도 밤이 온 걸까.
핸드폰 시계 화면의 분 단위 숫자가 바뀌는 것을 봐 버렸다. 표준시간의 시계가 작동했다는 것은 두 세 계의 왜곡은 사라지고 다시 같은 시간을 공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시곗바늘이 겨우 6도 움직였을 뿐인데 나의 밤은 가버리고, 아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와 분노를 쏟아내듯 서로를 , 혹은 허공을 향해 지르는 클락션 비명을 들으며 나는 다시 창을 잠그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서은우, <고요한 방, 거룩한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