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쨍쨍 내리쬐는 햇살, 후덥지는 공기.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른다. 깨끗하고 단정한 시골마을 한가운데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 그늘에 있자니 매미 소리가 우렁차다.
정지된 화면 같은 풍경 속에서 할머니 한 분이 보행기를 끌며 천천히 걸어오신다. 시골에는 사람이 없다. 젊은이는 거의 없고 대부분 어르신들이 산다.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신 할머니가 홀로 사는 집이 많다.
나는 괴산두레학교 노래교육 촬영이 있어 시골 마을 경로당을 방문했다. 괴산두레학교는 한글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해 글을 모른체 살아오신 어르신들에게 한글교육을 하는 곳이다. 이번에는 어르신들의 삶을 노래로 풀어내는 과정을 기획했다.
'옹헤야' 민요의 음을 활용하여 할머니들이 직접 가사를 붙였다. 할머니들에게 "사는 게 어때요?"라고 물었고 각자의 대답을 담았다. 한 사람씩 "기분 좋게 사는 거야, 그대로 사는 거야, 사는 대로 사는 거야, 그냥저냥 사는 거야, 하루하루 사는 거야."라고 메기고 여럿이 옹헤야 소리로 힘차게 받아넘긴다.
촬영을 마치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편하게 말씀하시지만 할머니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죽자 살자 하고 살았어. 절대 그냥 안 살았어. 지금은 일을 못하니까. 사는 대로 산다는 말이 나온 겨.", "별별 농사를 우리는 다 힘들게 했어. 아침 해놓고 들에 가 담배 따고, 와서 밥 차려주고 설거지하고 또 따러 가고, 숨도 못 쉬게 살았어."
요즘은 세탁기, 로봇청소기 등 가사노동을 줄여주는 최신제품이 즐비하다.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 버튼만 누르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세상이다. 할머니들의 삶은 지금에 비하면 고생스러웠다. "옛날에는 보릿짚 발로 차서 넣어가면서 불 때고 담배를 건조실에 갖다 놓고 또 와서 불 안 붙으면 발로 차는 거지. 정신없이 일하고 가는 겨."
요즘은 대부분 맞벌이를 한다. 육아도 같이 하고 밥이랑 설거지 등 집안일도 함께 한다. 남자들이 옛날같이 살았다가는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부부 둘이 일을 해도 맞벌이로 안쳤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애기 나면 어디 남자들이 애기를 안고 그랴. 어른들한테 혼날라고." 지금은 아빠 혼자 아기를 안고 소아과를 찾는 풍경은 흔한 풍경이다.
만약 내가 옛날에 태어났으면 더 편했으려나? 아닐 것 같다. 요즘은 옛날보다 더 경쟁이 심한 사회이다. 옛날에는 조금만 노력했어도 쉽게 풀렸던 일들이 지금은 온힘을 다 해도 풀릴까 말까 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옛날 정신상태에 못 미친다고 다그칠 일도 아니다. 후진국 시절에 태어났던 세대의 환경과 선진국 시절에 태어난 세대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80년 넘게 살아오신 할머니들이 여생을 바라보는 입장은 한결같다. "안 아프다가 저녁 잘 먹고 가면 그만이지. 요양원만 안 가면 복이여. 자식들한테도 신세 안 지잖아. 오라 가라 소리 안 하고. 바라는 건 그거여. 내 손으로 끓여먹다 가는게 그게 제일 복이여."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매미소리가 크게 울린다. 촬영으로 괴산두레학교를 찾을 때마다 어르신들에게 삶의 울림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