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시
박성현
#1
잠을 자두는 게 좋겠어,
내가 말했지 입술을 길게 찢었는데
혀 대신 촉수가 튀어나와
꿈틀거렸다네 숲속에 들어갔을 때
검은 성모가 그려진,
반쯤 붙에 타고 비에 얼룩진 성화를 들고
수녀들이 지나가고 있었지
(일렬로 정렬한
비슷한 표정, 비슷한 키와
냄새, 비슷한 보폭)
맨 끝에 뒤처진 수녀에게 물었더니
세체니교*를 건너왔다고 말하더군 염천인데도
벨벳으로 머리를 싸맨 그녀는
선데이서울에 인쇄된
사해(四海)의 메마른 달빛 같은 목소리였지
잠이나 자둬야겠어, 나는 중얼거리면서
수녀들을 따라갔지
#2
우박이라도 내렸어야 했어,
달궈진 양철지붕을 올려다보며 말했네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맞췄지만 일정한 톤의 뉴스만 나왔지 50대 중반 남자 아나운서가 전달하는, 오 분 간격의
특색 없는 사건들
끝없이 반복되는 광고와
(여기서는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아,
노래가 없다는 듯, 없어야
한다는 듯)
상한 치즈처럼 고약한 냄새들이
양철지붕에 매달린 채
머리를 짓눌렀지
말벌이 지나가면 다시 낮이 시작되고 나방이 날아와 내 눈을 덮었어 우박이 쏟아져야 해, 나는
성화를 든 인형들을 뒤섞으며 말했지
#3
묵시는
다른 사람의 눈을 파먹는 자의
예감이다 그러나
계시, 곧 에포프테이아epopteia**는 자신의 눈을 파먹는
자에게 엄습하는 신의 맹렬한 도래다
#4
나는
신의 계시로 열린 숲속을 걸으면서
검은 성화를 든 수녀들의
긴 행렬을 만나게 된다네 몸을 섞고 피를 마셨으며 뼈를 취했지 열락이 극에 달했을 때 그 옛날 심장을 찢었던 것이 회색 인간이라는 확신이 들게 된 거야 아주 밝은 주황의 데드-마스크를 쓰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으며 파수꾼처럼 덤불에 숨은 채 회색 인간이 쓴 묵시의 기록을 읽어야 했다네
머리 위는 무간(無間)의 염천이고
그 식지 않는 열기는 아케론***을 도발했지
숲의 불면,
숲의 고리,
숲의 매듭,
이런 이미지는 낮에서 태양을 분리한다네
낮과 안개, 낮과 눈썹, 낮과
라디오를 켜도 참호를 파는 개미 떼 같은 지긋지긋한 날씨 말고는 아무런 얘기도 없었어
웃으면서 회색 인간이 말했지
─ 네가 아니면 그럴 리 없다, 고
#5
염호(鹽湖)를 떠다니며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완전한 나체 완전한 기분 홍가시나무처럼 새빨간 머리카락 어둠을 걷어낸 배꼽을 중심으로 새겨진 태양의 나선형 무늬
(숲속의 벨벳 수녀들이 걸어갔던)
그들은 공중에 작은 사각형을 그리고 그 안에 새를 가뒀지 새는 방향에서 차단되었고
방향을 고집하다가
방향을 잘라낸 벽에 부딪쳤지
우박처럼 떨어지는
새, 수면을 떠다니며 파닥거리는 완전한 나체의 사람들 홍가시나무를 풀어놓은 듯 고약한 냄새들이
양철 지붕에 매달려 있었다네
내 사각형에 들어오지 마, 회색 인간이 내게 소리 질렀지 내가 축제를 망친 것처럼 내 알고리즘이 잠을 방해한다는
의사의 멍청한 진단처럼 회색 인간은 눈꺼풀을 열고 울음을 쏟았지
물결치는 지느러미 사이로 나는 얼어붙었지 잠이라도 자둬야겠어 네가 아니면 그럴 리 없겠지만,
수다스러운 새들이 회색을 벗기며 말했다네
한밤에도 양철 지붕은 밝게 타올랐지
* 부다페스트 서쪽에 위치한 현수교. 1849년 개통)
** 명상 혹은 묵상의 경지
*** 희랍 신화의 저승을 감싸고 흐르는 강
- 월간 <문학사상> 2023년 12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