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시와 언어
언어는 예술이 되기를 거부한 채 우리의 일상으로 잠입하지만, 동시에 일상이 되기를 거부하며 예술로 남으려고 한다. 이율배반과 같은 이 야누스의 두 얼굴은, 언어가 예술로 확장되는 순간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고통과 착란이다. 특히, 시의 언어는 신기루처럼 사물과 발화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우리의 접근을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리는 어린 악마와 같은 속성도 내재한다. 잘 알려진 바, 언어 예술이란 언어의 형상적 기능과 예술의 창조적 속성이 결합해 있는 무척 불편한 단어다.
우리는 이미 어떤 문장을 시로 간주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다. 무엇을 그 ‘무엇’으로 규정하는 사고방식은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 체계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사고의 틀을 벗어나서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다. 인식이란 대상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하며, 이성의 고유한 시스템(혹은 ‘논리’)을 통해 비로소 ‘어떤 것’으로 규정된다.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소환하지 않아도 우리는 언어 밖의 어떤 것을 말할 수 없다. 미지(未知)란 언어의 바깥이다.
물론 이 과정의 예외는 없다. 다만, 현상학에서 강조하는 ‘괄호-치기’처럼 대상을 향한 우리의 사유를 잠시 멈추게 할 수 있으며, 이때 대상은 그 다른 체계로 배치되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마치 태양계의 마지막 궤도를 행성의 자격으로 운행하던 명왕성이, 순간의 조건 변경으로 그 지위를 박탈당해 왜행성으로 재분류된 것처럼.
인간의 모든 언어에는 일정한 크기의 중력장이 형성되어 있다. 예컨대, ‘죽음’이라는 단어는 그 의미를 투명하게 이끌어내는 다른 단어와 문장들과 교감 또는 상응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이미 형체를 갖춘 담론-이미지와 맥락을 통해서 막 형성되는 담론-이미지가 혼재되어 있다. 죽음과 관련해, 한 시인이 ‘무’(無)에 대해 쓴 문장, 이를테면 “나 알겠네. / 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우리가 알았네. / 알지 못했네, 우리는 / 있었지만, 거기에는 없었지. 그리고 이따금씩 / 오직 무(無)가 우리 사이에 서 있을 때라야 /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였지.”(파울 첼란, 「저 많은 성좌들,」)38)(파울 첼란, 「저 많은 성좌들,」)와 같은 문장은, 무(혹은 ‘없음’)가 죽음과 궤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무는 단지 ‘없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죽음’이라는 인간 고유의 ‘실존적 물음’을 향해 열리는 것이다.
지금 창백한 나는 황폐한 정원으로 간다
버려진 식탁 위 ─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된
나의 상복 안에
마치 죽은 이처럼 몸을 누인다
마치 우리와 같이, 철 지나 시든 꽃
장미를 내 위에 흩뿌리며……
─ 제오르제 바코비아,「거울 속에 비친 시」 부분39)
제코비아가 소환한 실존의 기억들은 이상하게도 상복을 입은 시인 자신의 시체로 표상된다. 그는 창백한 몸을 이끌고 황폐한 정원으로 갔을 때, 버려진 식탁 위에 죽은 이처럼 몸을 누인, “철 지나 시든 꽃”을 보게 된다. 그의 언어는 심장을 향해 불처럼 타오르며 장미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본다. 장미와 단번에 공유되는 시간,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시인만의 ‘기억-언어’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거울이라는, 현실을 완벽하게 좌우대칭으로 읽는 착시는 언어에 저항하는 시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 이를 통해 시는 언제든지 죽음을 삶으로, 또한 삶을 죽음으로 전이시킨다.
[고찰⑧] 시의 언어는 구조적 착시를 통해 언어에 저항한다.
38) 파울 첼란, 앞의 책, 136쪽.
39) 제오르제 바코비아, 김정환 옮김, 『납』, 문학과지성사, 2007, 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