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시와 언어
‘언어의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이라는 잠재적 형식으로 생산된 작품들은 모두 세계를 받아들이고 내면화한 시인의 관점이 언어 속에 농축되어 있다. 우리는 이 언어 예술로서 만들어진 시의 중력장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일 때가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시와 시가 아닌 것이 분류되고 있다는 것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웬만해서 그 중력장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익숙하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 번 고착된 사유의 보수적 성향 때문지도 모르겠다.
언어 예술의 중력장은 언어를 예술로서 다루는 모든 행위를 포괄한다. 여기서 예술이란 로댕의 <지옥의 문>처럼 조각가의 내면에 깃든 형상-이미지와 담론-이미지를 하나의 분명하고 구체적인 조각(추상을 포함한)으로 이끌어내는 작업이다. 따라서 언어를 예술로 다룬다는 것은, 수천 년간 누적된, 계승・발전된, 혹은 그 기능을 완전히 소진해 전혀 다른 양식으로 재구성(변형 혹은 재탄생)된 문학 양식 전체와 관련된다.
그 기본적인 속성은 언어를 마치 음악처럼 혹은 미술처럼 다루는 것이다. 우리가 시를 ‘운문적 언어 구성체’나 ‘회화적 상상 구성체’로 간주할 때 강조된다. 전자의 경우, 언어의 음악적 사용이 핵심이다. 시의 단어나 구조를 활용해 특수한 리듬감이 생기도록 만드는 것으로, 독자에게 일정한 리듬감을 체험하도록 만듦으로써 시가 아닌 다른 문장과의 차별을 유도한다.
나비야 청산에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 작가 미상, 「나비야 청산에 가자」
위 시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운문 장르였던 시조다. 3장의 형식과 네 개의 소리마디를 기본으로 만들어지는 정형적 소리 가락으로 특히 일정한 글자 수가 반복되고, 또한 단어를 발화(發話)할 때 목소리의 톤을 길거나 짧게, 혹은 높거나 낮게 조율함으로써 음악적 쾌감이 배가되도록 만들고 있다. 볕이 잘 드는 평상에 앉아 이 작품을 읊조리면 한 편의 고요하고도 유장한 가락을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리듬감이 탁월하다는 얘기다. 물론 지금은 가락을 배제한 채 문장으로만 구성된 시조가 창작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시조는 남아 있는 유일한 정형시 장르로 많은 시인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한편 ‘회화성’이란 수많은 목소리들에 의해 만들어진 시각적 이미지들이다. 우리가 단어나 문장을 읽을 때, 마치 그림이나 사진,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많은데, 이것은 언어에 구조적으로 내재한 ‘그림-영상’의 적극적인 발현이다. 이 ‘발현’은 대부분 개별적인 현상으로 개인에게 녹아든 경험의 파편들이 사건이라는 연속된 시퀀스를 통해 마음을 뒤척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묵화(墨畵」 전문38)
김종삼 시인은 자신이 본 황혼 무렵 어느 농가의 풍경을 6행이라는 짧은 문장으로 담아낸다. 어쩌면 이 문장 말고도 수많은 다른 문장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을 것인데, 시인은 다른 문장-이미지들을 배제한 채 할머니가 물먹는 소 목덜미에 손을 얹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움직임에 집중한다. 그리고 할머니의 손처럼 사소한(혹은 ‘사소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을 배치하면서 그 아무렇지도 않음의 찰나적 폭발력을 배가시킨다. 물먹는 소와 할머니 손, 서로의 발잔등을 제외하고 다른 것들은 백지의 이면으로 물러나 버렸다. 묵화란 동양화에서 쓰는 용어로, 먹의 농도(짙고 엷음)를 이용하여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이보다 더 적확한 매칭은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이미지를 장면의 잘려진 순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미지는 스냅 사진과 같아 항상 다른 장면과의 맥락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가령 고개를 약간 젖힌 채 환하게 웃는 표정은, 주변의 가볍고 밝은 분위기를 농축한다. 이미지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김종삼 시인의 시는, 비록 겉으로 드러난 정보는 많지 않지만, 오히려 급속한 산업화로 재편되는 당대의 황폐하고 쓸쓸한 농촌의 분위기를 담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초현실주의적 추상성’이 있다. 이것은 아방가르드 미학을 일컫는다. 자동화된 예술의 관습적 경향을 일소하는 만큼 상당히 급진적이며 무정부주의적이다. 시인들은 우리가 실험이라 부르는, 온갖 가설을 쏟아내고 그것을 시 창작에 응용한다. 기반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과거로부터 이어진 건축물은 끔찍한 지각변동 속에서 붕괴된다. 당연히 이 언어에는, 이제 막 시작된 혁명적 상황으로 인하여 체계 자체가 없으며 우리가 사건으로 부를 성숙하고 안정된 사유도 없다. 단지 우리의 감각을 단절시키는 충격적인 ‘유령-목소리’와 ‘이명’, ‘착시’가 있을 뿐이다.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
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
비누가통과하는혈관의비눗내를투시하는사람
지구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의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
거세된양말(그여인의이름은워어즈였다)
─ 이상, 「건축무한육면각체」 부분39)
근대 이전 조선의 언어가 결코 다다른 적이 없던 세계가 이상의 등장으로 갑자기 열려버렸다. 이것이 초현실주의적 추상성의 ‘힘’이다. 모국어는 예술가의 개성과 자의식을 인정했으며, 비로소 ‘개인’이라는 자본주의적 (소비) 주체가 한반도에 정착했다. 위 시는 1930년대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백화점과 아케이드에 대한 알레고리에서 출발한다.
사각형의 콘크리트 건물 안에는 또 다른 사각의 내부 공간이 촘촘하게 박혀 있으며, 그 안에도 사각의 진열 공간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사각형의 내부에는 사각형이 있고, 더 작은 사각형은 끝도 없이 축소되는 것이다. 시인 이상에게 이러한 현상은 조선만의 특이성이 아니다. 지구를 잠식한 자본주의는 인간의 모든 것을 마리오네트로 만들어버릴 설계를 마쳤고 그 동력인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아방가르드는 이 비-인간적인 감각과 사유에 대한 저항이다. 단순히 인간의 습속을 정지시켜 새로운 미학적 활로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정치, 새로운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시인들의 피가 응집된 것이다. 다만 아직 명명될 만큼 충분히 정돈되지 않은 채 수많은 열망이 융해되어 있다는 이유로 추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사태를 되돌아보고 그것에 적절한 이름을 붙이며 하나의 질서 있는 사건으로 고양되기 전까지는.
이처럼 언어 예술에서 음악성과 회화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하다. 이는 언어의 본질적 구조와도 관련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예술’로 부르는 인접 장르와의 교섭 결과다. 시는 이 두 조건을 통해 자신의 내적 세계를 정교하게 다듬고 깊이를 만들었으며, 또한 다른 장르로 확산시켜 왔다. 물론 시대 혹은 민족이나 국가마다 선호하는 경향은 달랐지만, 대체로 이 상황은 지켜졌다. 음악성과 회화성, 초현실주의적 추상성 등을 통해 시는 독자들과 충분히 소통하며, 그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고찰⑨] 언어 예술의 세 조건은, 음악성, 회화성, 초현실주의적 추상성이다.
38) 김종삼, 「묵화」, 『김종삼 전집』, 청하, 1988, 71쪽.
39) 이상, 「AU MAGASIN DE NOUVEAUTES」, 『이상 전집 2』, 가람기획, 2004, 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