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시와 언어
이제 우리는 시가 무엇인지, 어떤 조건과 속성, 양태에서 부화되는지를 살펴야 할 차례다. 통상 우리는 시를 언어의 예술로 배웠으며, 그 개념을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시에 대한 이 정의는, 더 이상 반박이 불가할 정도로 관습적이다. 하지만 시를 감동을 주는 언어 예술로만 규정한다면 아귀가 맞지 않다. ‘감동’은 모든 예술이 갖춰야 할 덕목이며, 감동 없이는 예술이 성립하지 않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감동을 주는 모든 것을 우리는 시라고 부르지 않는다. 시라는 예술의 특수한 시스템을 통해 발화(發話)되는 언어만을 시라고 규정한다.
때문에 우리는 언어 예술을, 언어의 형상적 측면이 강조된, 다시 말해 도구적 측면을 배제하지 않은 어떤 특수한 시스템으로 가정하고 시에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언어로 된 것─그것이 ‘작품’이든 ‘냉장고 사용설명서’든─ 우리의 시선에는 적어도 시를 무조건 언어 예술로 규정하는 그 ‘관습’에 저항할 수 있으며, 여기서 발생하는 미세한 ‘시차’(視差)를 통해 시의 예술성을 좀 더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어떤 문장을 시로 읽으며, 동시에 어떤 문장은 시로 읽지 않는다. 늘 간과했던 것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무척 흥미롭다. 예컨대, 정호승 시인의 「부석사」의 한 문장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는 광고 카피인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와 왜 다른가? 이 차이는 무엇인가? 미리 말하자면, 이는 로만 야콥슨이 『언어학과 시학』에서 개념화했던 ‘문학성’의 근본 질문인데, 여기서 문학성이란 특정한 문장이 예술로 고양되는 특수한 구조로서, 어떤 글이 문학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변별적 특질’(trait pertinent)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음악이 기본적으로 소리의 예술이고, 미술이 색채와 선의 예술이라는 차원과 동일하다. 언어를 통해서 시인 자신을 표현하고 그/그녀가 수용한 세계를 정교하고 섬세하게 다듬는다는 측면에서 시는 예술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초등학교 때부터 들어왔고, 무수한 사전에도 인용되고 있으며, 그 이상으로 시를 정의할 문장은 없어 보인다. 시를 언어 예술로 규정한다는 것은, 마치 인류 전체를 사랑하겠다는 신의 웅장한 포부와 같지만 다른 대안은 쉽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언어 예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시를 언어 예술로서 정의할 때, 우리는 시의 어떤 측면을, 어떤 구조와 시퀀스와 의미를 예술이라는 미학과 연결시키는 것일까. 게다가 언어 예술이라는 단어에는, 만일 어떤 문장이 사회적 차원에서 언어 예술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게 될 때, 우리는 이미 그 판단 기준을 갖고 있다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사실인 까닭은, 일상의 도처에 펼쳐져 있다. 같은 모국어를 사용해도, “어디든 잘 어울려 플랫슈즈 마련해”34)라는 문장은 이미 시가 아니다. 반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35)는 명백히 시로 분류된다. 우리는 선험적으로─어떤 문장을 마주하고서는─, 그것이 시, 혹은 시가 아닌 것으로 판단하면서, 특히 ‘시’라고 학습했던 그 틀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때 일부 대중은 아방가르드나 에로티시즘이 부여하는 새로운 감각을 거부하며 이를 기존의 미학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1930년대 이상의 시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일군의 독자들을 기억하자.
지금도 이러한 ‘저항’은 흔하다. 우리 시단을 휩쓸고 있는 ‘AI가 쓴 시를 시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겨우 첫발을 디뎠을 뿐이다. 사이버 문학의 초창기였던 1990년대에는 ‘PC통신 문학을 문학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도 문제적이었다. 미등단 작가의, 익명의 PC통신-플랫폼에 연재하는 문학이 얼마나 문학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당시에는 무척 진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술은 태생적으로 모든 관습에 저항하는, 임제 선사의 ‘할’(喝)36)까지 확장될 수 있다. 예술은 미라의 박제된 감각이거나 아직 도래하지 못한 미지의 감각이 아니며, 오로지 ‘순간’만 현존하는 미학이다. 과장하면 ‘역사’와 ‘이력’조차 없다. 예술은 자신의 모든 기반과 조건들을 리셋한다. 때문에 예술은 당대의 무수한 논쟁을 유발하며 격렬한 활력을 부여했던 아방가르드나 극단적 에로티시즘도 가능하다.
작품과 작가, 독자를 연결하는 문학의 삼각형도 예술의 순간성이 강렬하게 반영되어 있다. 작품은 독자의 시선이 닿을 때 존재하고, 작가는 작품을 집필하는 그 시간-속-에서만 살아 있으며, 독자는 작가의 문장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고양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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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제나 살불(殺佛)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관습에 저항하는 것─김수영 시인이 “시여 침을 뱉어라!”고 일갈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범속하다고 돌려세웠던가. 예술은 기존의 미학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종속되려는, 살불과는 정반대의 속성 또한 가지고 있다. 물론 예술을 수용하고 이를 전개하는 대중의 판단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향후 다른 대중에 의해 상반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중요한 것은 예술에는 두 얼굴, 마치 야누스와 같은 속성─예술과 비예술의 확연한 대칭─이 있다는 것이고, 시를 쓸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34) 구두 브랜드 SOVO의 포털 사이트 광고.(2023. 9. 26일자.)
35) 정지용의 시, 「향수」
36) 임제(臨濟, ?~867)는 중국 당나라의 선사다. 임제종의 창시자로 그의 가르침을 담은 『임제록(臨濟錄)』이 남아 있다. 이 책에서 임제는 그 유명한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언급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한다는 선불교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