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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승부

2024.03.22. 금

by 고주


학교에 온 지 3주.

한 달 계약으로 왔으니 일주일 남았다.

몇 군데에서 2주, 3주짜리 시간강사 제의가 들어오기는 했으나, 아픈 선생님이 돌아오시지 못하면 좀 더 해달라는 부탁이 있었기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었다.

어제는 교감 선생님이 직접 실로 오셨다.

한 달은 더 있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다음도 우선순위로 생각해 달라고, 절대로 다른 곳으로 가시지 말라고.

걸어서 15분, 등·하교 길이 너무 좋다.

중학교에 막 입학한 아이들과 서로 길들여져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또 어디로 가서 적응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고, 젖 먹여 키운 아이를 돌려보내야 하는 유모의 심정이랄까 아쉽기도 했다.

고맙고 다행이다.

이제 시험출제와 생활기록부에 기록해야 할 과목 특기사항, 동아리, 자유학기제 예술활동 내용도 챙겨야겠다.

실에 문을 열고 청소하려는데, 분실물을 찾으러 온 아이가 있다.

지난 월요일에 하교 후 운동장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밖에 전시해 놓은 함에서 발견했단다.

S9 휴대폰을 받아 들고 얼굴이 확 펴진다.

그동안 엄마에게 엄청나게 혼이 났다면서.

“이제 절대로 술을 먹지 않겠습니다.”

땅이 꺼지게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고개를 흔드는 부장님.

얼굴빛이 창백하다.

후유증만 없으면 맨날 밥 대신으로 술만 먹고살겠다 했다.

목만 간질이는 서울 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남겨둔 흥 주머니.

내일이 없을 것같이 태워버린 술자리와 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앞자리 미술 선생님은 두어 번 내가 보낸 글에 많이 반성했다며 하루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매일 후문에서 학생 맞이를 하는 것, 복도를 순회하고 밥 먹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 수업 시간에 오는 반응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내 글의 소재들이라고.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이었던 것들이, 내가 이름을 불러주니 다가와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선생님의 시를 인용해 독사눈을 하고 학교를 누비는 내 모습에 변명을 보탰다.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1. 신현림” 책을 반납하고 2를 뽑아오는데 사서 선생님이 쳐다본다, 눈의 평수를 줄이면서.

하루에 한 권씩 읽으시냐고, 시집 내셨으면 달라고.

와! 개코다.

판매용은 아니고 퇴임하면서 제자들이 만들어 준 한정판 시집은 있다고 했다.

기름집 아들이 고소한 냄새를 달고 다니듯이, 책과 자주 대화하는 나에게서 책의 눅눅한 기운이 느껴지나?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내 손으로 들고 가서 봐달라고 말하기는 쑥스러웠는데, 못 이기는 척 드려야겠다.

정성스럽게 작가의 인사말까지 써서.


3교시 방송 댄스 시간.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을 무용실 뒤로 불러 출석을 부르려는데, 명찰을 가리고 나를 쳐다보는 소녀.

빨리 이름을 말하라는 엄한 눈빛.

머릿속 절반이 하얗게 모래사장이 된다.

“효영이”

순간 꺼지는 눈빛, 눈 속의 매화꽃을 보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가린 명찰을 보여준다.

효정이.

아이고, 실수했구나, 이미 흩어진 물이다.

“정영태 선생님” 하는데, 숨이 멎는 것 같다.


보릿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보고 있다.

춤이란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리듬을 타야 하고, 박자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가지고 놀아야 하는데 말이지.

밀 몇 빼고는 완전 보리밭이다.

머슴아들도 열심히 따라 하고 있다.

5층에서부터 지그재그로 내려오는 점심시간 교실 순회.

3층 1반 쪽으로 들어선다.

효정이가 친구와 신나게 이야기하며 가고 있다.

좀 빠른 속도로 다가간다.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 “효정이”하고 부르려는 순간.

오른쪽 귀 뒤로 넘어온 팔이 내 안경을 강타한다.

“선생님 죄송해요.” 뒤돌아선 효정이가 놀라서 두 손을 싹싹 비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가던 길 서둘러 간다.

내가 벌을 받은 것이여.

그래, 오늘은 비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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