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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클리드

2024.03.21 목

by 고주


보행기를 밀고 가는 중절모 할아버지

떡 아이는 용상에 앉아있는 왕처럼 두리번두리번

무거운 가방을 메고 뒤따르는 내 손녀쯤 보이는 머리 긴 아이

아이들의 시간 속으로 끌려가는 할아버지의 세월

7시 30분이 조금 지나면 매일 보는 풍경

오늘은 보행기가 자주 멎는다.

보행기를 잡고 따라가는 아이가 자꾸 고개를 짤랑짤랑 흔든다.

징징대는 울음 섞인 소리가 들린다.

가방 꼬리에 묶인 곰돌이가 더 세게 도리도리 한다.

더디게 흘러가는 하루다.

30분쯤 지났나, 허리 꼿꼿하게 세우고 힘차게 걷는 할아버지가 반대 방향으로

파랗고 높은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시계 볼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헉헉거리며 뛰어오는 저 녀석만 들어가면 끝이다.


제일 활발한 6반.

큰 수들의 공약수를 구하는 편리한 방법을 소개한다.

중학교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고등학교에서는 반드시 공부하게 된다.

식에서는 공통인수를 찾는 인수분해가 쉽지 않기 때문에 매우 유용한 방법이 된다고 침이 튀도록 설명한다.

한숨을 돌리고, 방법을 처음 발표한 유 씨라는 성을 가진 우리나라의 누구겠느냐고 묻는다.

유재석, 이놈아! 유재석이 수학까지 잘하면 너무 불공평하다. 그럼, 사람이 아니다.

유치원, 그래 너는 아직 유치원생 같다.

유방, 설마 음흉한 생각은 아니겠지? 항우와 겨루었던 그 사람 맞지?

함께 웃다가 유클리드라고 알려주고 수업을 이어간다.

내가 원하는 만큼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따라오던 연이가 손을 든다.

“선생님, 유클리드가 진짜 우리나라 사람이에요?”

아이고 머리야, 이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이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몇 아이들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 사람이고,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위대한 수학자라는 설명도 보탠다.

효정이는 복도를 순회하는 3학년 교실이 있는 5층까지 쫓아왔다.

정 길영 클 태, 정영태 선생님이요.

의기양양하게 외치고는 달려간다.

팔딱팔딱 튀는 고라니 같이.


<먼지>


누구 때문에

누구를 잘못 뽑아서

이렇게 한방에 거덜 날 수 있느냐고 하지만

나는 분노한다

수북이 쌓인 골방 먼지처럼

문이 조금만 열려도 들고일어나

제일 늦게까지 가라앉지 않은 놈들

보이지도 않는 수많은 것들이

한순간에 내 허파를 갉아먹는 것들이

아무리 걸레질해도

풀풀 날리기만 하는 것들에게



<머리 감기>


덜 떠진 눈으로 머리를 감는다

백일 지난 아이 다루듯 조심조심 샴푸 먹인 두피를 문지른다

몇 번이고 헹군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감는 것보다 헹구는데

훨씬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용실 다녀와서

설렁설렁 감겨주는 주인장 욕하며

다시 빡빡 문질러 놓고

각질이 왜 날리는 것인지

두피는 제가 화나게 해 놓고

엉뚱한 다리만 긁고 있었다

세상을 제 맘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제 발등 찍는 경우가 몇 번인가?

제발 남 탓이나 말지


<조마조마>


당신이 날아가면 어쩌나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쥔 내 손에

힘이 더 들어갑니다

당신이 날아가기 전에

죽기라도 하면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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