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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손잡고 1
13화
처음의 의미
2024.03.20. 수
by
고주
Apr 13. 2024
날도 추운데 똥꼬까지 올라간 치마를 입고 오다 교문을 지나면서는 손으로 자꾸 치마 끝을 잡아 내리고.
슬리퍼 찍찍 끌고 오던 녀석은 힐끔 눈을 치켜뜨고는 꼬랑지 집어넣은 강아지처럼 줄행랑치고.
뭔가 꺼림칙한 일이 있는 치들은 다 표시가 난다.
알아서 표시를 낸다.
요즘 전혀 걸리적거리지 않는 사람도 있더라만.
달관한 도사랄까, 아니면 죽기밖에 더 하겠냐는 배짱이라고나 할까.
좀 으스스한 말을 쏟아내는 데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저속한 표현도 없고, 꼭 그렇게 할 것 같은 믿음까지 주는 사람.
자꾸 그곳으로 발걸음이 옮겨지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문을 열어놓고 실의 청소를 한다.
마스크까지 쓰고 후문으로 학생 맞이를 나간다. 20분이나 더 빨리.
간간이 복도순회를 한다.
현관 청소는 직접 빗자루 춤을 추며 진두지휘한다.
교장 티가 빠지는 걸까? 아니 교장 때나 똑같다.
어쩌면 나에게는 교장 모자가 흔쾌하지 않았었는지 모르겠다.
교정에 떨어진 휴지를 줍다 보면 깊은 곳의 몇 개는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양심에 좀 걸린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다.
하여간 사서 고생이다.
오늘도 정이는 나에게 나비처럼 날아온다.
명찰을 가리고 또 제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내 이름을 가르쳐달란다.
길 영에 클 태, 정영태라고 했더니 몇 번을 입으로 읊조리더니, 정길태란다.
아마 몇 번은 더 벌처럼 쏘겠지.
머리에 팬티를 쓰고 354명이 10분 동안 축제를 벌이는 아침 뉴스에서 보았던 이야기를 해준다.
다들 미쳤다고 난리다.
바로 기네스북에 기록으로 등재되는 순간이었다고.
누구에게는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 받겠지만 세계에서 처음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둘 수도 있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세계의 가장 높은 곳을 정복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31번째 완전수를 찾는 지구의 최초의 사람이 되겠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조금 개운하지 않았던 “왜 그것을 찾아야 됩니까?”는 질문에 대한 보충 설명이었다.
분위기 탓일까 제법 진지해졌다.
최대공약수를 구하는 방법으로 유클리드 호제법을 소개해 준다.
지금 몰라도 되지만 고등학교에서 또 배우게 된다.
큰 수일 때 최대공약수를 빨리 찾는 방법인데, 구체적인 내용은 관심 있는 학생들은 꼭 찾아보았으면 좋겠다.
50년 자전거를 탔지만 아직도 두 손은 놓고 타는 방법을 모른다.
처음에 몇 번 넘어질 각오로 시도했다면 허리가 아플 때 달리면서도 쉴 수 있었을 텐데.
편한 방법이니 처음에 시도해 보라고 부추긴다.
분명 몇 아이는 그리해 보리라.
복도에서 만나면 수학책을 보이면서 재미있어 항상 손에 들고 다닌다며 자랑하는 녀석이 생겼다.
아직 대놓고 자는 녀석 한 명도 없다.
수업 시간이 너무 재미있다는 아이들도 많다.
한 학기라도 같이 생활하면 수포자 많이 구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옆 반 선생님이 종례를 부탁한다.
12년 만의 종례.
엎어져 있는 아이를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 고개를 흔들어도 미동도 없다.
손을 잡았더니 툭 떨어진다.
온몸의 털이 선다.
녀석들이 옷을 뭉쳐 인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참 맹랑한 녀석들이다.
한바탕 웃음으로 시원하게 집으로 돌려보낸다.
유쾌한 하루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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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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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손잡고 1
11
그녀의 등굣길
12
왜?
13
처음의 의미
14
유클리드
15
무승부
호랑이 손잡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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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신으로 모시는 고주망태입니다. 36년의 교직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은 영원한 청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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