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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등굣길

2024.03.18 월

by 고주 Apr 13. 2024

 

눈이 보이지 않는 은하철도 999 철이 같은 아이가 온다.

머리카락을 눈썹 아래로 길게 늘어뜨렸고 마스크를 썼다.

교복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두 손은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숙인 고개 안에서 무슨 생각이 복잡한지 인사도 받지 않는다.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하는 목표물이다.

일단 오늘은 탐색.    

 

“와! 수학 선생님이다. 오늘 1교시가 수학인데, 곧 봐요.”

뜨는 해만큼 밝은 표정, 시키면 죽는시늉까지 할 것 같은 순둥이다.

내가 좋은 걸까? 수학이 좋은 걸까?

둘 다라고 해두자.

헐떡이며 교문을 닫고 들어가는 놈, 매일 바로 그놈.

이놈아, 습관이 인생을 바꾼다.   

  

배움터지킴이로 출근하시는 어르신이 책 한 상자를 들고 오셨다.

‘그녀의 등굣길’

어려운 젊은 날을 건너 늦게 공부를 시작한 만학도이고, 아침과 오후 두 학교에서 교통지도와 학생지도를 하고 계신다.

주말이면 병원에서 상담도 하신다니 몇 개의 삶을 사시는 것인지.

나도 바쁘게 산다고 고개에 힘 좀 주는데 명함도 못 내밀겠다.

일하지 않으면 곧 쓰러지는 대한민국의 노인네들, 투표만 좀 잘하면 얼마나 좋아.    

 

1교시에 만나기로 한 고 녀석이 보고 싶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학급 자치 시간으로 반장 선거가 있다나. 

엎친데 덮치고, 늦는 반은 계속 빠지는 일만 생긴다.     

031 번호로 오는 전화.

옆 고등학교에서 10일 간만 수업을 해줄 수 없느냐고.

이번 달 말일까지는 근무라고 했더니 긴 한숨을 내쉰다.

다급하기는 한 모양이다.

같은 실에 두 분의 선생님들은 펄쩍 뛴다. 

“아니 되옵니다,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란다.

외국인 노동자를 데리고 와서 여권을 빼앗듯이 무슨 수를 내야겠단다.

든든하고 고마운 말이다.

나도 집 가까운 이곳에서 조금 길게 있고 싶기도 하답니다.    

 

사과 8개와 귤 12개를 똑같은 개수로 접시에 놓는 방법을 공부한다.

약수와 최대공약수의 개념을 이용한 실생활 활용 문제.

사과로 불을 때고, 귤로 끓인다.

둘을 합쳐 뜸을 들여야 하는데, 눈이 황들 이 되었다.

이 녀석들을 불구덩이 속에서 꺼내와야 하는데, 손을 잡아끌어도 버틴다.

귀에다 후하고 입김을 불어넣어서라도 회생시켜야 한다.

처절한 응급처치가 진행되고 있다.   

  

3학년 복도를 지나다 보니, 잠수함처럼 아이들 숲에 묻혀 고개만 보인다.

덩치들은 남산만 해졌는데, 맘은 어떨까?

이 녀석들에게 내 미래를 맡겨도 될까?

믿음이 덜 가 나오는 것이다, 한참을 더 나와야 한다.   

  

검지만 한 총각김치에 오징어초무침이라, 충무김밥 각이다.

마파두부에 감자탕까지 어디에다 내놓아도 기죽지 않은 점심 반찬이다.

2학년 단체활동 인솔해야 하는데, 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학생부장의 말에.

하루라면 아이들이 개를 너무 좋아해서 데려갈 수도 있는데, 물지는 않느냐고 묻는 어떤 여선생님.

순하고 사람을 잘 따른다고, 밖에 데리고 나가면 다른 개들이 짖는 바람에 좀 사나워진다나.

마치 자기가 사람인 줄 알고 있단다.

호텔에 맡기려면 무려 5만 원, 여행을 가더라도 주로 차박을 한다고.

집사의 모습이 막 그려진다.    

 

졸리는 오후, 청소나 하자.

중앙현관에 나가 열심히 빗자루를 놀리고 있는데, 교무부장이 보고 놀란다.

시키지 않고 직접 하시느냐고.

아이들은 물걸레 청소를 하니 미리 먼지를 쓸어내는 중이라고 했다.

감격의 눈빛.

아마 영원히 학교에 묶어두고 싶은 심정이리라.

저도 바쁘답니다.

6월은 하늘이 쪼개져도 있을 수 없답니다.

고대하고 고대하는 황산을 좋은 사람들과 꼭 가야 하거든요.

그전까지만 어떻게 안 될까요? 

그 후도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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