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진정으로 가슴 뛰는 경험.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오다 가슴 뛰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입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도 환호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책을 읽지 않은 이라도 기뻐했겠지요. 한국문학계가 목마르게 바라던 노벨문학상을 다른 이가 아닌 그녀가 수상했다는 소식 때문에 기쁘기도 했지만, 이 작가가 그 어떤 소란도 몰고 다니지 않으므로 더 그러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시를 만났습니다. 이토록 고요한 시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달아 이토록 느낌이 짙은 시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저 흘러가 버릴 한순간을 잡아낸 시, 그러나 아주 길고 긴 영원을 말하는 시, 이토록 평범한 순간을, 그러나 아주 특별한 순간을 큰 목소리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읽어가는 그녀의 편안한 낭송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반쯤 눈을 감은 듯한 그녀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문학과 지성 2013
시를 읽고 있노라니 단 몇 문장을 가지고 씨름한 몇 날, 아니 몇 달이 떠올랐습니다. 그녀의 문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문장을 번역한 영문소설이었습니다. 그 첫 부분은 원작과는 달랐기에 왜 그랬는지를 생각해야 했지요.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그 첫 부분을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일들에 대해 그녀는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번역가를 믿는다는 말뿐이었지요.
조금 전, 학생들과 씨름한 문장도 떠올랐습니다. 그 문장들은 이것과는 전혀 달랐지요. 우리가 씨름한 문장은 엄청나거나 대단히 문학적이거나 한 문장은 아니었습니다. 젋은이들에 관한 요즘의 세태를 다룬 소설이었고 우리는 매끄러운 표현, 잘 전달되는 표현을 찾느라 몇 시간 동안 머리를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어처구니없게도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학생들의 문해력 발전에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한강의 책이 많이 읽히고 덕분에 깊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정신의 밥을 더 많이 먹기를, 그 덕분에 밥 이면에 있는 것들을 더 잘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한 번 그 생각이 떠오르니 그들의 눈망울이 떠오르면서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이 시는 한순간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느 늦은 저녁이라는 것을 보니 화자는 어떤 일로 인해 집에 늦게 돌아왔거나 하루 종일을 바삐 지내고 혹은 어떤 일에 몰두해서 지내고 늦게서야 밥상 앞에 앉은 것으로 보입니다. 늦은 저녁 밥상에 앉은 이의 모습은 적막합니다. 외로운 것이지요.
밥을 뜨려던 화자는 문득 김이 오르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김이 올라오는 그 건너편의 모습도 보이겠지요.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 순간에 화자는 어떤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는 밥을 뜰 생각조차 잊습니다. 김은 이내 사라집니다. 보는 순간 사라지니 그 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않습니다. 김 오르던 순간처럼 화자 자신도 곧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을까요. 순간이 지난 다음 화자는 생각합니다.
밥을 먹어야지. 밥은 밥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도록 육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밥이지요. 너무도 익숙하고 너무도 당연해서 우리는 잊고 있습니다만 몸은 마음에게 말을 합니다.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그 욕구를 따라 우리는 밥을 찾습니다.
밥을 먹는 그 순간은 영원입니다. 지나가버릴 그 순간은 다시는 오지 못하는 순간이므로 그 하나의 순간으로 남지만 그 어떤 순간도 그 순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은 그 하나만으로 유일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그 순간들이 모여 나를, 당신을, 우리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그 밥을 무엇으로 읽어야 할까요. 그 밥은 나에게 무엇인지요. 내가 먹고 소화한 그 밥은 어떤 모습인지요. 당신이 먹고 소화한, 그 밥은 무엇인지요. 그 밥은 무엇을 이루었는지요. 나는 여전히 밥을 먹습니다. 당신도 여전히 밥을 먹습니다. 몸은 말해주지요. 내가 먹은 밥이 바로 나라고, 당신이 먹은 밥이 바로 당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