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별빛처럼 수놓은 어느 어머니 이야기
1화 사랑의 노래
3월의 하늘은 자주 잿빛 옷을 입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수업을 마칠 무렵에는 조록조록 봄 소리로 가득했다. 이 땅에 더 머무르고 싶어 하던 겨울도 스며드는 봄의 입김에 슬슬 꽁무니를 감추고 있었다.
재훈은 방과 후 활동을 마치고 혼자 운동장으로 나왔다. 아이들이 돌아가 버린 운동장은 쓸쓸해 보였다. 봄비가 아이처럼 수많은 발자국을 남기면서 놀고 있었다.
재훈은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교문으로 곧장 나가지 않고 구름사다리가 있는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름사다리에 매달려 노는 봄비를 한 손으로 쭉 훑었다. 빗방울들이 동동거리며 아쉬워했다. 물 묻은 손을 바지에 쓱 닦은 재훈은 구름사다리 옆에 있는 시소 한쪽을 꾹 눌렀다. 내려가 있던 쪽이 공중으로 쑥 올라갔다. 빗방울은 재훈이의 머리로, 짊어진 가방으로, 웃옷과 바지로 헤집고 들어왔다.
“재훈아!”
“어, 어머니!”
언제 왔는지, 빙그레 웃고 서 있는 엄마 곁으로 달려갔다.
“곧장 오지 않고, 웬 장난이람.”
“전 새싹이잖아요, 비를 맞아야 잘 크지요.”
“이건 산성비란다. 몸에 해로워.”
“네, 알겠습니다, 어마마마.”
하나의 우산 속에 엄마와 꼭 붙어서 돌아가는 재훈은 좋았다.
“어머니, 운동장에서 제가 뭘 생각했는지 아세요?”
“글쎄, 뭘 생각했지?”
“우리 어머니 생각.”
“저런, 내가 안 왔으면 서운할 뻔했구나, 시장에 들렀다 갈까?”
“그래요, 어머니. 무거운 것은 제가 들고 갈게요.”
엄마와 팔짱을 끼고 가는 시장길이 재훈은 즐거웠다.
어느덧 봄비는 가늘어지고 있었다.
시장 입구에 있는 과일 가게는 풍성했다. 사과랑 밀감으로 수북하고, 토마토랑 딸기까지 싱그러웠다.
“모든 과일은 제철에 가장 맛난 법인데, 엄만 요즘 입맛이 없구나.”
“그러고 보니, 얼굴색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 조그만 일에도 가슴이 뛰고, 봄을 타나 봐.”
한숨을 쉬는 엄마의 표정을 보며 재훈의 가슴은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한 손으로 엄마의 왼팔을 꼭 잡고 시장을 나왔다.
엄마는 왼쪽 다리를 약간 절었다. 천천히 걸으면 표가 나지 않지만, 걸음을 빨리하면 왼쪽으로 약간 기우뚱해졌다. 재훈이가 아주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다고 들었다.
“엄마, 어딜 다녀오세요?”
막 도착한 버스에서 폴짝 뛰어내린 큰누나 진영이었다.
“응, 비가 와서 재훈이 학교에 갔다가 시장에 들렀다 오는 길이야.”
“엄만, 언제까지 재훈이를 치마폭에 싸서 키울 작정이세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진영아, 너야말로 대학 4학년이다. 철 좀 들어라, 철.”
“관둬요, 엄마. 누난 본래 성질이 그런걸요, 뭐.”
“성질? 그래 말 잘했다. 난 너만 보면 자꾸 성질이 난다.”
어머니가 불러도 큰누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먼저 가 버렸다.
재훈은 자신이 꼭 겨울나무가 된 것 같았다.
희망과 행복을 가지마다 달고서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앙상한 가지마다 바람만 지나다니는 겨울나무의 가슴처럼 공허했고 쓸쓸했다.
어릴 적 기억으로 큰누나는 그렇게 자기를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재훈은 생각했다.
누나 셋, 그 밑으로 재훈, 보통 큰누나가 남동생을 제일 좋아한다는데, 이상하게도 진영이 누나는 재훈을 싫어했다. 어릴 적에는 별로 못 느꼈는데, 철이 들면서 누나의 시선은 재훈의 조그만 잘못에도 가시처럼 마구 찌르고 들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재훈을 너무 좋아하니까 상대적으로 미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차츰차츰 재훈을 향한 누나의 알 수 없는 미움이 큰누나 앞에 서면 들판의 벼 이삭처럼 수그러들기만 했다.
집에 들어서자, 마당에 있던 셰퍼드 진세가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했다.
재훈은 한 손으로 진세의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었다. 노란 큰 눈으로 재훈을 바라보는 진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발을 씻은 재훈은 곧바로 숙제하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입 안 가득 침을 고이게 했다.
“배가 고픈 모양인데 조금만 기다려.”
어머니가 시금치나물을 무치면서 재훈을 보고 말했다.
“네, 어머니. 저 미영이 누나 방에 있을게요.”
재훈은 거실 서쪽에 있는 셋째 누나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대답이 없었다.
방문을 살짝 열어 보니, 누나는 등만 보인 채, 헤드폰을 끼고 머리를 까닥거리며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재훈은 살금살금 다가가 두 손으로 누나의 얼굴을 싸안았다.
“어디 보자, 우리 왕자님 손이구나.”
재훈의 손에서 빠져나온 누나는 헤드폰을 벗고 레코드플레이어 소리를 높였다.
“신나지?”
“‘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잖아.”
“빛으로 물들일 거야, 다이너마이트처럼, 인생은 다이너마이트!”
누나는 노래를 부르면서 말했다.
“어쭈, 제법인데. 우리 재훈이는 BTS를 모르는 줄 알았지.”
“BTS를 모르면 지구인이 아니지.”
“그런가? 호호호!”
“킹콩, 씽송, 딩동, 핑퐁. king kong, sing song, ding dong, ping pong.”
누나는 노래에 맞춰 가볍게 춤을 추었다. 재훈도 누나와 함께 몸을 흔들었다.
“어머! 너희들 뭐 하니?”
둘째 누나 선영이가 방문을 활짝 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에는 어김없이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선영이 누나는 책벌레였다. 고등학교 3학년인 누나는 책을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도 잘하고 말이 없었다. 화장실에 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언제나 한 권의 책이 누나의 손에 벌레처럼 붙어 있었다.
선영 누나가 말이 없는 반면에 미영 누나는 명랑했다. 둘째 누나가 안 읽은 책이 없다면, 셋째 누나는 모르는 노래가 없었다. 치마를 즐겨 입는 둘째 누나, 청바지가 많은 미영 누나. 누나들은 너무나 대조적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재훈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언니야말로 고등학교 3학년이 웬일이야? 이렇게 빨리 집에 오다니.”
“오늘 모의고사 쳤어. 너희들 흥을 깨서 미안, 어서 저녁 먹으러 가자고.”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잖아.”
항상 늦으시는 아버지를 빼고 누나 셋, 엄마, 재훈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또 책이야? 밥 먹을 땐 밥을 먹어야 몸에 살이 붙지.”
“친구한테 빌린 책이라 내일 돌려줘야 한다고요.”
“무슨 책인데?”
곁에 있던 미영 누나가 책을 들추며 물었다.
“응, 『사랑의 노래』라는 어느 사형수 어머니가 쓴 수기인데, 너무나 슬프고 가슴이 아파. 모든 어머니의 한량없는 사랑 때문에 목이 메어.”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바다니, 하늘이니 하지 않니.”
말없이 밥만 먹고 있던 큰누나가 말했다.
“난 자기가 낳지도 않은 자식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죄를 감싸 주고 희생하려는 새엄마의 사랑이 감동적이었어.”
“어디 책에서만 보니? 우리도 매일 몸으로 느끼고 있잖아.”
큰누나가 그릇을 들고 일어서면서 재훈을 보고 말했다.
재훈은 누나 말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누나는 항상 가시처럼 남의 마음을 찌르곤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는 성미니까.
잠시 침묵이 밥상 위로 흘렀다.
“큰누나는 주워 온 자식인가? 아무도 그러지 않은데…….”
저녁을 다 먹은 재훈은 혼자 중얼거리며 마당으로 나왔다.
언제나처럼 진세가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했다.
미영 누나 방에서 들은 다이너마이트 노래가 귓가에서 맴돌아 진세와 마주 보며 흥얼거리는 저녁, 하나둘 별들이 나타났다. 차갑게 보이기는 하나 빛을 가졌기에 따뜻한 별. 만져 볼 수 없고 너무 멀리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별.
재훈은 그렇게 한참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니, 잠깐 품었던 누나에 대한 미운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재훈아, 전화 받아, 지혜야.”
선영 누나가 무선 전화기를 마당까지 가져다주었다.
“재훈이니? 너랑 의논할 일이 있는데, 내일 시간 있지?”
“무슨 일인데?”
“응, 영선이 문제야. 우리가 좀 어떻게 해 줘야겠어.”
“어떻게?”
“새엄마하고……. 아무튼 전화로는 안 되고, 내일 방과 후 뮤즈피아노 교습소 앞에서 만나, 그럼 끊는다.”
재훈은 빙긋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와 수화기를 놓았다.
지혜.
5학년 때 짝이었던 지혜. 상냥하고 공부 잘하며 복스러운 얼굴을 가진 아이, 늘어뜨린 긴 머리, 어떤 땐 종종 땋아서 날아갈 듯 얇은 나비 리본을 묶어서 이리저리 흔드는 그 아이. 은근히 6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아이.
재훈은 지혜가 마냥 좋았다. 예쁜 외모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지혜의 아름다운 마음씨였다. 남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아이, 옳은 일에도 주뼛거리며 선뜻 나서지 못할 때 용감하게 일어서는 아이,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구가 되어주는 아이.
괜히 기분이 좋아진 재훈은 휘파람을 불면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밤은 짙고 차갑게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