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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수자 Oct 12. 2023

낮에도 별은 빛난다

 4화 범어사에서

   야외 학습 가는 날, 아침 하늘은 아이들 마음처럼 푸르렀다. 군데군데 솜사탕을 떼 놓은 것 같은 흰 구름이 흐르고, 해님도 말개진 얼굴로 웃고 있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범어사.

   어머니를 따라 두어 번 와 본 절이었지만, 그때 기분과 아주 달랐다.

   재훈은 대웅전에 있는 부처님을 볼 때마다 무서웠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법당 안에 들어서면 부처님이 가부좌를 풀고 내려와 ‘이놈’하고 야단칠 것만 같아 슬그머니 나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나, 많은 친구와 몰려다니니 부처님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절 마당에서 반별로 사진을 찍은 후, 계곡으로 내려와 짐을 풀었다.

   하늘이 뵈지 않을 만큼 숱 많은 나무는 초록빛 머리를 풀고 머리를 감고 있었고,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빛도 속살을 훤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재훈은 철환과 영민이, 그리고 친구 몇 사람과 널따란 바위 위에 자리 잡았다.

   “모두 점심 먹도록 하세요, 먹은 후에는 자기 자리를 깨끗이 치우는 것도 잊지 마세요.”

   선생님 목에 두른 빨간 손수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빨리 먹고 대웅전 앞마당에 다시 가자.”

   재훈이가 김밥을 펼치면서 말했다.

   “그래, 추억을 찍어 둬야 해. 한번 지나간 사람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너희들 이 유철환!  유명해지기 전에 같이 사진 많이 찍어 둬라.”

   철환이가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내며 익살을 떨었다.

   “자식, 그만하고  맛있는 것,  이리 내놔!”

   입안 가득 김밥을 넣은 영민이가 젓가락을 흔들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재훈이 얼른 김밥을 내밀었다.

   “고맙다, 내 친구야.”

   영민이는 씹지도 않고 연방 먹을 것을 입으로 가져가며 또 말했다.

   "뭐니 뭐니 해도 재훈이 네 어머니가 제일이야. 김밥에다 초밥, 거기다가 갈비까지 이렇게 푸짐하니, 난 역시 친구 복은 있나 봐.”

   “그게 친구 복이야, 먹는 복이지.”

   “그래, 그 체중을 유지하려면 먹어야지. 먹어, 많이 먹어.”

   “다 먹었으면 슬슬 움직여 볼까.”

   재훈이가 일어섰다. 철환도 따라 일어섰으나, 영민은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누웠다.

   “난 여기 있을래. 너희들이나 추억 많이 만들어라.”

   “그러니까 살이 찌지. 먹고 좀 움직여라, 움직여.

   “정말 안 갈 테야?”

   재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철환과 둘이 절 마당으로 올라갔다.

   아이들도 둘, 셋, 짝을 지어 사진도 찍고, 석탑 앞을 기웃거리며 안내문의 내용을 수첩에 적기도 했다.

   지혜는 친구들과 석등 앞에 서 있었다.

   “재훈아, 여기!”

   “이리 와. 저기 기와 담벼락 너무 멋져! 내가 사진 찍어 줄게.”

   “그래, 너도 같이 찍어야지.”

   “아니야, 너희들 먼저 찍어.”

   지혜는 스마트폰을 높이 들고 셔터를 눌렀다.

   “또 찍을 사람 없어?”

   “지혜야, 넌 하나도 못 찍었잖아.”

   최신상 스마트폰을 꺼낸 철환이 말했다.

   “고마워. 나랑 찍을 사람 이리 와.”

   아이들은 웃기만 하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나 혼자 찍는다.”

   지혜가 손을 허리에 얹으며 말했다.

   “얘, 우리가 가고 싶어도 참는 거야. 너 재훈이랑 찍고 싶은 거지.”

   눈치 빠른 영순의 말에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재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지혜 곁에 가서 섰다. 햇살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마치 혼자만 벌거벗은 사람처럼 눈이 부셨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지혜는 재훈의 왼팔에 두 손을 끼고 방긋 웃었다. 재훈은 싫진 않았으나, 붉게 물든 얼굴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자. 멋진 한 쌍입니다, 여기를 보세요. 하나, 둘, 셋.”

   철환은 오른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린 후, 셔터를  눌렀다. 재훈은 얼굴이 달아오르고 목이 말라서, 대웅전 뒤에 있는 물을 마시러 혼자 뛰어갔다.

   ‘아니, 저 사람은…….’

   스님 한 사람과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 곁에 같이 나오는 사람은 바로 그 대나무 같은 아저씨였다.

   재훈은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부를 뻔했다. 자신도 모르게 대웅전 기둥에 몸을 숨겼다.

   “그럼, 법상 스님 안녕히 계십시오.”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주머니가 합장하자, 스님도 마주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아주 강한 빛이 재훈의 가슴에 닿았다가 순식간에 팔과 다리로 빠져나가는 묘한 느낌이었다.

   금방 물이 떨어질 것 같은 촉촉한 눈동자며 둥글고 하얀 얼굴을 보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정다운 얼굴이었다. 전혀 아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말을 걸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았다.

   재훈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는 동안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저씨처럼 아주머니도 키가 무척 컸고, 걸음걸이는 얌전했다. 아주머니는 서산에 지는 해처럼 윗몸이 보이고, 틀어 올린 머리만 보이더니 아주 사라져 버렸다.

   그날 이후, 맑지 못한 마음으로 불안했는데, 이건 또 뭔가? 이상한 아저씨와 함께 있는 낯선 아주머니를 보고 왜 가슴이 방망이질하는가? 또, 뒷모습을 보고 이렇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재훈은 조롱박을 동동 띄워 놓은 돌샘에서 바가지에 물을 떠서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비로소 아이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 손으로 입가 물을 닦으며 재훈은 계곡으로 달려 내려갔다.

   반별로 아이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즐겁고도 즐겁다. 꽃이 피는 봄동산,

    즐겁고도 즐겁다. 꽃이 피는 봄동산,

    산새 들새 모여 와서 지저귀는 이 아침,

    우리 모두 입 모아 고운 노래 부르자.


   재훈은 철환의 줄 옆으로 끼어들어 같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재훈의 목소리는 작아지다가 끝내 소리로 나오지 못했고, 멍하니 손뼉만 치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동그랗고 하얀 얼굴이 재훈을 자꾸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수건 돌리기가 한창이었으나, 재훈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재훈아, 뭘 하고 있니? 네 뒤에 수건이 있단 말이야.”

   철환이가 안타까운 듯이 팔을 잡고 흔들었다.

   재훈은 수건을 주워 힘껏 달렸으나, 술래한테 잡히고 말았다. 벌로 엉덩이로 학교 이름을

쓰는 벌을 받고는, 제자리로 들어왔다.

   아이들의 웃음과 노랫소리는 하늘 높이 올라가 무르익은 봄 잔치로 즐거웠다.

   그렇지만, 재훈은 아저씨가 한 말을 되씹으면서, 자꾸만 대웅전 앞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어쩌면 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이상한 아저씨가 던진 말이 너무 말도 안 돼서, 지워버리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 말은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이었다.

   “너를 낳아 준 엄마는 따로 있어. 널 무척 보고 싶어 한단다. 널 무척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재훈은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시간은 깊은 물처럼 소리도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재훈은 텔레비전을 보러 거실에 내려와 앉았다.

   “재훈아, 이번 어린이날에는 무슨 선물이 좋겠니? 내년부터는 중학생이니까 선물은 없다.”

   하얀 접시에 담긴 딸기 위에 눈이 와 쌓인 것처럼 우윳가루가 소복하게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거실의 테이블 위에 놓으며 재훈에게 물었다.

   “갖고 싶은 거 없어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재훈은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한 번도 어머니 말에 대꾸하거나 반항해 본 적이 없는 재훈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조그만 일에도 짜증이 나고 괜히 우울해졌다.

   “왜? 포켓몬 카드나 책이라든지, 아니면 옷은 어때?”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다시 물었다.

   “그보다 어머니, 몸은 괜찮은 거예요?”

   “응, 병원에 가니 심장이 약간 나빠졌다고 하지만 괜찮아.”

   “저, 어머니, 혹시 나 주워다 기른 건 아니죠?”

   재훈은 목까지 나오는 말을 참으려다가 그만 뱉어 버렸다. 앞뒤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 버린 것이었다.

   “얘가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난 설거지하러 가야겠다.”

   일어서는 엄마의 다리가 가볍게 떨리고 있음을 재훈은 보았다.

   “말씀해 주세요, 저에게 숨기는 것도 없죠?”

   당돌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자신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재훈은 또 물었다. 불확실한 사실이 확실함으로 드러날 때의 일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숨기다니, 뭘?”

   어머닌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듯이 일어서다가 재훈의 물음에 발목이 잡혔다. 불안과 고통이 뒤범벅된 얼굴, 재훈은 엄마 얼굴에서 다시 한번 그늘을 보았다. 엄마의 마음을 콕콕 찌르는 바늘이 된 재훈은 흠칫했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거실과 부엌 사이에 드리워진 딸기 무늬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텔레비전을 끈 재훈은 이층으로 올라갈까,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벼랑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처럼 아찔한 순간들이 자꾸만 재훈의 마음속으로 파도 되어 달려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나를 에워싼 안개가 분명히 있어. 틀림없어.”

   재훈은 중얼거리며 마당에서 서성거렸다.

   “그래, 난 누구지? 알아내야 해!”

   불끈 쥔 두 주먹을 본 진세도 가만히 재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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