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대나무 아저씨
다음날, 지혜는 뮤즈피아노 교습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 가르마에 이마를 살짝 덮은 쉼표 머리가 뮤즈 피아노 교습소와 잘 어울렸다.
“왜 이렇게 늦었니?”
“선생님이 영민이 눈높이로 수학 공부 좀 도와주라고 해서…….”
“너희 선생님, 참 자상한 분이야.”
“우리 선생님을 잘 아니?”
“그럼, 문예부 선생님이잖아.”
“우리 선생님은 친구처럼 다정다감하다가 잘못했을 때는 엄청 단호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걸 제일 싫어하지, 그땐 생각 의자에 가야 해.”
“생각 의자?”
“응, 교실 뒤편 빈 의자에서 반성하는 곳이지.”
“눈을 감고 자기 잘못을 마음속으로 말하고는 제 자리로 가는 거야.”
“뭐,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어렵진 않지만, 창피하잖아.”
“하긴, 지적만 당해도 창피하긴 하겠다.”
“그런데, 영선한테 무슨 일이 있어?”
“응,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년이 다 되어 가잖아. 그런데도 병원에 계신 것처럼, 다시 돌아올 사람처럼 그리워하고 있으니 너무 하지 않니? 새엄마는 새엄마대로, 무척 힘드나 봐. 그분도 좋은 분이거든.”
“새엄마하고 무슨 일이 있대?”
재훈은 지혜와 나란히 걸으며 어려운 친구를 생각하는 지혜의 고운 걱정을 어떻게 나눌까, 생각했다. 사실 재훈은 영선하고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영선은 새엄마의 보살핌을 진실로 봐주지 않는 거야. 칭찬하는 것, 걱정하는 것, 심지어 만들어 준 음식까지 거부한다고 하는데, 새엄마는 물론이고, 영선이 아빠도 무척 힘들어하신대. 한 번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갔거든. 그다음 날, 아빠가 데리러 왔는데도 가기 싫다고 버티는 거 있지. 걱정이야.”
“그렇구나.”
“겨우 우리 엄마가 달래서 보냈는데, 언제까지 새엄마를 미워할 순 없잖아. 마음을 빨리 잡는 방법이 없을까?”
재훈은 두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사실 우리에겐 새엄마란 단어가 너무 낯설어. 우리가 영선이 입장이 돼 본다는 것은 더욱더 힘들고 말이야. 그렇지만…….”
“그건 그래. 명랑하고 밝은 옛날의 영선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무슨 얘기를 해 줘야 할지…….”
“아마, 시간뿐일 거야. 세월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겠어?”
지혜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재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간이라면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는 된 것 아닐까? 2년이 다 되어가는데…….”
“글쎄, 충분할까? 아무리 새엄마가 잘해 준다고 해도 자기를 낳아서 길러 주신 분과 비교가 되겠니? 마치 진한 물감에다 물을 타면 그 색이 점점 엷어지기는 해도 그 물감은 여전히 물속에 녹아 있듯이 말이야.”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뭐지?”
“모든 일은 영선이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 두고 보는 것도 영선을 위하는 방법이 될지도 몰라. 기다리는 거지.”
“그렇지만, 그건 친구의 슬픔을 방관하는 것밖에 더 돼?”
“그럼, 어떡해. 주어진 사실에 순응하는 것도 배워야 해. 우리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잖아.”
지혜는 재훈을 큰 나무를 보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참, 이상해. 그렇게 건강하던 지혜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 하며, 낯선 아줌마가 지혜 엄마로 있는 것, 이런 얘기로 너랑 만난 것 하며…….”
“이런 걸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지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너랑 영선이 집에 가 볼까, 했는데, 네 말을 듣고 보니 오직 영선이 자신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 길밖에 없겠네. 나의 지나친 관심이 영선이 마음을 더 닫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
“지혜, 넌 참 좋은 친구야. 영선이한테는 물론이고 나한테도.”
재훈은 횡단보도 앞에서 지혜와 헤어졌다.
아침부터 흐린 날씨는 오후가 되어도 계속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만은 따뜻했다.
초록 불이 반짝 들어왔다.
재훈은 보도에 그어진 흰 선을 사다리 밟듯이 건너갔다.
그리고, 영선의 일일랑 잊어버리고 휘파람을 불면서 집으로 향했다.
골목 앞 가게 근처에 왔을 때였다.
“네가 재훈이야?”
전봇대 앞에 낯선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여자같이 흰 얼굴에 까만 안경테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네, 제가 재훈인데요.”
“많이 컸구나. 몇 학년이지?”
“6학년이에요.”
“아버지도 안녕하시지?”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 아저씨처럼 친절하고 다정스러웠다.
“그, 그런데 아저씬 누구죠?”
“응, 널 잘 아는 사람.”
“난 아저씰 모르는데, 아저씬 절 잘 안다고요?”
‘이 아저씨 혹시 유괴범이 아닐까? 확장한 아버지의 사업이 잘된다는 것을 알고, 데리고 가서 돈을 요구하려는…….’
만약의 경우 냅다 달아나려는 자세로 재훈은 뒤로 물러섰다.
“날 두려워하는 것 같구나. 그럼, 다음에 봐, 잘 가.”
그러고는 회색 바바리코트에서 한 손을 빼 들고, 두어 번 흔들며 저벅저벅 가버렸다.
재훈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괜히 남을 의심했나.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아저씨가 가버린 골목길엔 바람만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느덧, 운동장 울타리 개나리들이 하나둘 쪼끄만 입으로 노래하며 초록 꿈을 키우는 4월이었다. 봄 햇살은 뛰어노는 아이들 얼굴에도, 파랗게 올라오는 새싹들도, 품은 듯 열리는 꽃봉오리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는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동쪽 하늘에 있는 햇살 샘인 해님이 재훈의 눈을 실낱처럼 만들고, 운동장에서 노는 아기 바람도 재훈의 귓불을 간질이며 즐거워하는 눈부신 날이었다.
체육 시간이 있어 더 즐거웠던 목요일 오후였다.
함께 축구를 한 철환과 헤어지고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였다.
한 번 보았던 그 아저씨가 건너편에서 재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신호등은 빨간 불이었다.
“재훈아, 건너오지 말고 거기 서 있어.”
대나무같이 키가 쭉 뻗은 그 아저씨였다.
재훈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생긴 모습과 달리 나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또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의 경우,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도망을 가야 하나, 고함을 질러야 하나. 파출소는 여기서 먼데…….’
재훈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반짝 초록불이 들어왔다.
“잘 있었니?”
아저씨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늘 나하고 얘기 좀 할까?”
“저, 아저씨! 무슨 얘긴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 가서 해요.”
재훈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무슨 일이 있니? 너 불안한 것 같다.”
“난 아저씰 몰라요, 얘기할 것도 없고요.”
재훈은 급히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했으나, 이미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재훈아, 난 말이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야. 안심해.”
아저씨는 두 손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난 말이다, 네 외삼촌이야.”
아저씨는 또렷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뭐라고요? 우리 엄마는 무남독녀예요. 형제가 없어서 외롭다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난 너에게 진실을 말해 주고 싶을 뿐이야, 다른 뜻은 없어.”
아저씨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재훈도 자석에 끌리듯 아저씨를 따라 걸었다.
“널 낳아 준 엄마는 따로 있어. 멀리 떠나야 할 사람인데, 너무 보고 싶어 하기에 큰마음먹고 또 왔단다.”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는 아저씨는 재훈을 바라보지 않았다.
“뭐라고요? 엄마가 따로 있다고요?”
재훈은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웃었고, 아저씨가 너무 싱거워서 웃었고, 또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얘기라서 ‘쿡’ 웃음이 나왔다.
“나도 바쁜 사람이야. 재훈아, 엄마를 한 번만 만나 주지 않을래?”
“아저씨, 아무래도 잘못 봤어요. 이름은 같지만, 다른 재훈이가 있는가 봐요. 전 가겠어요.”
더 이상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재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아주 시원한 물 한 잔 주세요.”
“그래, 목이 많이 마른 모양이구나.”
“아뇨, 이상한 아저씨…… 아니야, 미친 아저씨였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잖아요. 찬물을 마시고 정신 좀 차려야겠어요.”
어머니는 유리컵에 물방울이 맺힌 시원한 물을 재훈에게 주면서 물었다.
“누가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러니?”
“말도 안 돼요. 날 보고 낳아 준 엄마가 따로 있다고 하잖아요.”
“뭐라고?”
엄마는 가지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얀, 아주 하얀 도화지 같은 얼굴이 된 엄마가 괴로워했다.
마침, 들어오던 미영 누나와 재훈은 엄마를 일으켜 안방에다 눕혔다. 누운 채, 이마에 손을 얹은 어머니가 재훈을 힐끗 보고는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청심환 한 알을 먹고는 잠이 들었다.
재훈은 지난여름 큰비가 온 뒤에 보았던 바닷가 모래사장이 생각났다. 해초 더미와 여러 가지 찌꺼기와 함께 밀려와 있던 꼬까신 한 짝. 재훈의 마음은 외로운 한 짝의 그 꼬까신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