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성과 객관성

by 똘이엄마

장님 코끼리 만지기


여러 명의 장님이 각각 코끼리의 코, 귀, 다리, 꼬리 쪽에 서서 코끼리를 만져보고 있었다.

코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란 뱀과,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 꼬리를 만진사람은 밧줄,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 몸통을 만진 사람은 벽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은 사실인 동시에 사실이 아니다. 그 어느 누구도 코끼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정확히 알고 싶다면 이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을 해야만 한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막연힌 움직임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동을 꺼려하게 되고, 결국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계속 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할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수시로 이런 잘못을 한다.

나에게 주어진, 익숙한 관점에서만 문제를 보고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꼬리 앞에 있던 사람이 ‘최선을 다하려면’ 적어도 4군데 이상의 다른 위치로 이동해서 코끼리를 더듬어 봐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는 ‘코끼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자격이 비로소 생긴다.


입장헤아림의 어려움


우리는 각자 ‘자기식’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건을 건네 주고 받을 때 이런 점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건네주는 쪽은 상대방의 손이 닿는 순간 상대가 ‘넘겨받았다’ 고 생각하고 물건을 놓고, 상대는 ‘닿았지만 잡지는 않은’ 상태에서 물건을 떨어뜨린다. 물건이 예상을 빗나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을 떄, 즉 무겁거나, 뜨겁거나, 찬 경우 이러한 상대적 판단 차이는 더 커진다.

물건이 떨어지게 되면 이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점은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일평생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볼 수 없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실제적으로 꺠닫게 된다.


만일 거울이 없어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면, 사람들은 지금처럼 자신을 꾸미는데 공을 들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 물론, 타인을 볼 수는 있으므로 타인의 평가에 의해 꾸미는 일을 하기는 하겠으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할 방법이 없으므로 철저하게 꾸미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울을 통해 우리는 타인에 의해 인식되는 스스로의 존재를 본다. 거울을 보는 나 자신도 거울 속의 나에게는 타인의 관점인 것이다.


상호 작용의 개념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부모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친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타인이 예상을 뒤엎은 행동을 할 때 우리는 ‘배신감’을 느끼고 ‘뒤통수를 맞았다’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거리를 두고 대했을 경우는 이런 식의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일종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이 부여한 상대의 ‘역할’ 에 따른 기대 행위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므로, 수시로 우리는 그 기준에 상대가 미달함을 경험하고, 그로 인한 실망과 연이은 분노를 느껴 상대를 원망한다.

그러나, 종종 직접 김장작으로 연루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관계 당사자와 같은 의견이 아닐 수도 있고,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는 것이 과도한 기대에서 비롯됐다는 정확한 판단을 해 주기도 한다.

이럴 경우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준이 보편적인 수준에서 벗어났는지 검토를 해야 한다. 주관적인 기준에 집착해서 피해의 정도를 과장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가치 기준을 정할 때는 보편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편협한 행동이 나와 자신이나 타인에게 본의 아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입장(立場)

바로 눈앞에 처하고 있는 처지나 상황. 또는 그런 처지에 대한 태도.


소극적이고 순종적인 성격의 딸과 적극적이고 직설적인 엄마가 오랜 시간 사이 좋게 지내왔다.

시집을 간 딸은 엄마의 일을 돕기로 스스로 자원, 같이 일을 하는 중에 엄마가 사소하게 배려하지 않은 일에 폭발, ‘늘 그런 식이었다.’며 분노하여 덤벼들었다.

엄마는 청천벽력 같은 이런 딸의 반응에 충격을 받았고, 한편으로 힘들었던 결혼 생활 중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텨왔던 자신의 삶에 회의가 들어 딸에게 욕지거리를 하게 됐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바라보고, 당연시 여겼던 부분에 의해 오해 아닌 오해가 생겼던 것이다. 이토록 자신의 관점에서만 상대방의 반응을 해석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갈등의 이유가 되는지 모른다. 소소한 갈등이 오랜 기간 쌓이기 쉬운 가족 내부에서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심해질 수 있다. 그만큼 근접하여 지내며, 심리적으로 타인에 비해 기대 수준이 서로 높기 때문이다



심리적 거리 영역 확보


우리나라는 바다 건너 미국과 국경선 문제로 갈등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본과는 독도 문제로 치열하게 대립한다.


충분히 떨어져 있는 대상과는 영역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인접해 있는 국가들 간에는 서로의 영역 싸움이 있다. 즉, 가까운 존재일수록 서로의 영역에 대한 경계를 명확하게 하여야 갈등 발생을 줄일 수 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부딪칠 일이 많고, 사소한 입장 차이에 의한 불편의 탑이 높아질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서로 비슷하다는 전제하에 교류하다 보니 자연히 기대 수준은 높아진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사이에 뭘’ 이라는 생각은 부지불식간에 갈등을 조장하는 이유가 된다.



개념의 정확한 정의


오른쪽과 왼쪽의 적절한 힘의 균형이 우리에게 필요하듯이 어떤 개념을 적절하게 적용하려면 반드시 그 개념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과 보편적인 외부의 기준이 적절한 선에서 어울려야 비로소 개념의 올바른 의미와 실천 기준이 완성 된다.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이 있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당분간은 좌절감을 겪겠지만 그것이 자기 비하와 연결되지 않는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최선’이라는 기준이다.

이 단어는 지극히 주관적일 위험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정한 기준에 자족하는 것 만으로 자부심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도전을 준비할 때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은 스스로가 정한 기준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닌,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제공하는 쪽의 기준에 최대한 부합하려는 고려를 했다는 자신감까지 포함되어야만 진정한 ‘최선’이 되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최선’의 정의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보완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


언어는 의사 전달의 완벽한 수단이 아닌, 최선의 수단일 뿐이다.

의미의 약속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에게 나의 생각을 전달하여 소통을 시도한다. 형태나 관찰이 가능한 명사나 동사의 경우는 그다지 문제가 없다. 아이가 첫 언어를 배울 때 명사와 동사의 순으로 익힌다는 것은 그만큼 이 어휘들은 보편성이 있고 객관성이 많아 공감대 형성이 빨라 배우기 쉽다는 증거가 된다. 형용사나 부사, 또는 같은 명사라도 추상적인 의미 – 사랑 같은 –를 가진 용어의 경우 생각만큼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은것이다.

빠르다 , 많다 비교할 기준이 존재하는데, 그 기준은 제각각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언어의 사용에 있어 이러한 주관적 시점을 간과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말의 의미에 따라 타인도 당연히 같은 뜻으로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본의 아닌 갈등이 유발될 수 있다.

언어는 유용하나 그만큼 한계가 분명한 표현 수단임을 항상 고려하면서 사용해야 한다.


‘그 까짓것 가지고’ ‘그 정도 일을 가지고’


악의 없이 하는 말 중에 가장 나쁜 말이 바로 어떤 것에 대한 이러한 말이다

상대방과 사소한 갈등이 있을 때 이런 말을 쉽게 하지만, 이 말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존중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실제 상당한 영향력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사소한 일로도 큰 감정적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깔끔한 사람이 1년에 한번 청소를 해도 전혀 괴롭지 않은 사람과 같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은 지속적으로 잔소리를 할 것이며, 듣는 사람은 ‘유난 떤다’ ‘피곤하다” ‘그까짓 걸(치우지 않은 일) 가지고 괴롭힌다’ 라고 하며 감정적인 반발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떨어져 있는 휴지조각을 발견하든지, 사용 후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수건을 볼 때마다 머리카락을 한웅큼씩 뽑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면, 치우지 않는 사람은 의도하지도 않은 가해자가 되는 것이므로, 역시 똑 같이 ‘괴롭히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잔소리 하는 사람은 ‘깨끗하게 지내야 하는 건 옳은 일인데, 왜 부당하게 화를 내나?’ 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일 상대방이 자신만큼 청결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지 않고 둔한 감각을 타고 난 사람이어서 자기 기준에 부합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체질이라면, 피차 좋자고 했던 일이 ‘괴롭힘'이 될 수도 있는것이다.


결국 이런 문제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 즉 ‘더 치우고, 덜 치우고’ 라는 ‘그 까짓’의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의 특성을 ‘존중’하여 ‘배려’ 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들게 하여 결국 분노를 유발하는 것이다.



정당방위 (正當防衛)

자기 또는 남에게 가하여지는 급박하고 부당한 침해를 막기 위하여 침해자에게 어쩔 수 없이 취하는 가해 행위


일반인도 비교적 쉽게 알아듣는 법률 용어로, 존재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본의 아니게 상대에게 가해자가 되는 상황에서 행위의 불가피성과 타당성 나아가 항위자체의 의도가 악의에 의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이 한마디에 들어있다.


주관적 정당방위


여기에 관해서는 쉽게 누군가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비난을 하는 주체는 비난의 내용에 떳떳해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이러한 주관적 정당방위의 달인? 이기 떄문에 비난할 자격이 없어서이다.

그럼에도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습관적> 이 되었을 때이다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정당방위를 머릐속으로 또는 드러내놓고 주장하지만, 어느 정도 사람들은 이내 자신의 자기중심성 사고의 문제점을 꺠달아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려 노력한다.

문제는 그런 정도의 객관적 사고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계속 같은 문제를 일으키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모든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한다’ 는 엉뚱한 피해의식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들의 특성은 역시 <주도성의 포기>를 한다는 것이다.

즉 반복되는 불편한 경험을 통해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려하는 게 아닌, 상대방이 자기를 제대로 대접?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동적으로 상대방의 변화된- 자기를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 행동을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다.

주변이 변해야 한다고 사람에게 문제 해결이란 없다.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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