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자기 합리화
사회적 존재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객관적인 관계 형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하나의 축은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주관적인 부분이다. 이 영역이 객관적 존재감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존재감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배고픈 여우가 울타리가 쳐진 포도밭을 지나가다가 맛 있어 보이는 포도 송이를 먹기 위해 갖가지 시도를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울타리를 떠나며 ‘저건 아마 굉장히 시어서 맛이 없는 포도일거야.’ 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실패한 일에 대한 변명으로 자기 합리화를 한다는 여우의 비겁한 태도에 초점이 맞춰진다. 합리화(rationalization)는 방어기제의 일종으로 ‘변명’ 또는 ‘핑계’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자기 기만’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다른 관점을 고려해 보자.
여우가 만일 ‘난 할 수 있어!’ 라며 끝까지 그 포도에 매달렸다면?
얼마 후 그 포도 나무 아래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을 지도 모른다.
살면서 우리는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융통성을 필요로 한다. 줄기차게 매달리는 것이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에 부딪쳤을 때는 그런 현실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이끌어 나갈 필요가 발생한다.
<저 포도가 시고 맛이 없을 수도 있으니 계속 매달리는 것이 꼭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런 생각으로 시도를 포기한다면 이를 비겁한 합리화라고 할 수 있는가?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저지른 것인가?
누구나 자신의 행동을 되새기고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고지식한 잣대는 자아를 짓눌러 질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는 객관적인 합리화를 통해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단, 보편적으로 납득 가능한 수준의 내용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희망 고문
에디슨은 전구 필라멘트 실험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성공한 뒤 말했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잘못된 방법 1만 가지를 발견했을 뿐이다.”
( I have not failed. I've just found 10,000 ways that won't work.)
희망이 있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매달려 애쓰는 고통스러운 상태 즉, 섣부르게 매달려 노력했다가 실패하면 좌절이 그 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희박한 확률의 투자에 지나치게 기대했다가 실패했을 시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아예 희망 자체를 가지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한편 일리 있는 말 같기는 하다. 만일 허황된 계획을 세우고 무모하게 추진한 일일 경우에는 사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번 생각하고 일정시간을 지속적으로 꾸준히 노력하여 투자한 끝에 목적 달성을 하지 못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정할 때 고려할 수 있는 요소들은 완벽하지 않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뭘 할까 왜 해야 할까 계획표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나름의 희망, 즉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따라 필요한 노력을 쌓으면 이것은 경험이라는 활용 가능한 정보가 된다.
그러므로 희망 사항을 정해 노력하다 보면 경험이 쌓이고 이를 토대로 어느 시점에 나에게 최적화된 희망을 깨닫게 된다. 즉, 적절한 희망은 정제 과정을 거쳐서 정해지는 것이다.
희망은 시작 단계에서는 감정적인 색체가 우세하다. 이는 강한 추진력으로 실행력의 효율을 높이지만, 중반기 이후 그 정서가 휘발하고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치면 최초의 감정적 활력은 더 이상 동력원으로서 작용하지 않는다. 중반부부터 희망의 지속은 이성이 담당하게 되는데, 목표를 잊지 않도록 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맡으면서 우리를 견인하여 전진하게 한다.
희망의 현실적인 표현은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목표가 없다면 계획은 성립하기 어렵고, 따라서 적극적인 행동 역시 가능하지 않다. 결국 희망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과정은 그 자체의 가치가 충분하므로 희망은 고문이 될 수 없다. 현실적인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희망은 고문이 아니다.
희망과 고문은 본질적으로 가리키는 방향이 정 반대이다. 희망은 주도적이며, 고문은 철저히 수동적인 위치에서 이루어진다. 이렇듯 정 반대의 개념은 동일 선상에서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희망 고문은 좌절의 감정을 두려워하는 철저히 감정에 의거한 표현일 뿐이며, 이 비합리적인 용어에 의해 섣불리 투지를 잃을 수 있다는 함정을 조심해야만 한다.
기꺼이 포기할 권리
목표를 향하여 내가 아는 모든 노력, 즉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면, 비록 그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과정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안정된 자부심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나온다.
머리 좋은 학생이 능력에 비해 노력을 덜 했다. 막상 입시가 닥챠 자기 수준에 <어울린다> 고 생각했던 수준의 학교를 갈 수가 없다는 현실을 꺠닫자, 엄청난 좌절끝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만일 이 학생이 부실한 준비에도 불구 본인의 생각한 대학에 합격을 하게 된다면, 이 학생은 이후 죽을때까지 행복한 상태로 살아야 한다. (이 학생의 주장에 따르자면) 명문대 합격은 자기의 생명과 바꿀 수도 있는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떄문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었다고 해서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할 때, 순간의 감격은 대단한 것이지만 한 달만 지나면 그 '위상'은 어느새 ‘기본’이 된다. 합격 당시 느낀 강한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휘발되기 때문이다. 새 차나 새 집을 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덧 현재 자신의 위치나 소유물은 당연시되어 최초의 감격을 다시 느끼기는 쉽지 않고, 새로운 불평거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결국 오랜 기간 유지되는 감정은 자부심으로 이것은 목표를 위해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다는 스스로의 판단을 통해 축적되는 자산인 동시에, 가시적인 목표 달성에 실패했더라도 미련 없이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럴 경우 방향을 바꾸어 다시금 노력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이 있더라도 ‘후회’라는 감정으로 뒤를 돌아보게 됨으로써 새로운 목표를 향한 추진력의 발목을 잡는 비효율적인 과정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보다 역동적인 과정을 밟을 수 있게 된다. 즉,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이야 말로 우리에게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권리를 동시에 부여하는 것이므로, 희망 고문이 잘못된 용어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과정은 소멸되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 이럴 때 객관적인 자기 합리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