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의 기도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용감히 맞설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가라앉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내는 마음을 청할 수 있게 하소서.
인생이라는 싸움터에서 아군을 찾지 말고
스스로의 힘을 찾아낼 수 있게 하소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지 말고
자유를 쟁취하는 인내심을 갖게 하소서.
성공 속에서만 당신의 은혜를 느끼는 비겁한 자가 아니라,
실의에 빠졌을 때야말로
당신의 귀하신 손을 잡고 있음을 알아채게 주소서.
이 기도문의 가장 중요한 바탕은 바로 능동성이다. 즉, 신에게 기도를 하는 그 순간에도 수동적인 삶이 아닌 주도적으로 삶을 가꾸어 나갈 힘을 달라고 원하는 것이다. 인간다움의 고유한 가치는 바로 이 주도성에 있는 것이다.
칸트의 보편 법칙의 정식(formula of universal law)
행동은 그 행동의 원칙이 보편적일 수 있을 경우에만 도덕적으로 옳다. 행위를 의식할 때 개념적으로나 의지적으로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자기 주도성
자기 주도성을 잃었다고 느낄 때 분노나 좌절이 생긴다.
어떤 사람에게 일을 시켰는데, 그 사람이 일을 상당히 잘 해서 정해진 보수보다 만원을 더 주었다.
어디선가 옷을 샀는데 알고 보니 다른 가게에서는 만원이 더 싼 옷이었다.
지출 액수가 동일함에도 전자의 경우는 마음이 즐거우나, 후자의 경우는 화기난다.
이것이 주도성의 차이인 것이다. 즉, 손해를 보는 것 같이 보여도 그 행위가 자기 주도적인 결정이었다면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나, 주도적 의사가 없이 다른 이의 결정에 의한 행동은 두고두고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다.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1960년대 Martin Seligman의 실험
피할 수 없는 전기 자극에 노출된 개가 탈출을 포기하고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보임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경험으로 인하여 실제로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거나 극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러한 상황에서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학습된 무력감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개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자기 주도성이다.
주도성은 선택의 선행조건이다.
모든 생명체의 생존 조건은 주도성의 유무에 달려 있다.
즉,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하에 자발적인 행동을 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생명체는 생물학적 존재감을 위하여 주도성을 행사하나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위해 생존에 영향을 받지 않는, 때로는 생물학적 존재감의 위협을 무릅쓰고 주도성을 행사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주도권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는 타인에 대한 원망과 자기 비하나 학대로 발전한다.
타인에 의해 자신이 망가졌다고 생각, 원망을 일삼는 사람은 스스로가 약하기 때문에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런 사람은 절대 상황을 이겨낼 수 없고, 항상 자신을 수동적인 위치에 놓아버린다. 자발적인 자기 비하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다. 타인이 자기를 함부로 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다.
‘내가 오죽 별로이면 저 사람이 나를 저리도 함부로 대할까.” 라고 하면서 상대편의 잘못에 면죄부를 준다.
주도하는 자세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의 이 말은 누구든 한번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걱정을 하면서 산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불안감으로 나타나고, 불안은 바로 현재를 좀먹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유효한 걱정이란 현재 그 문제로 인해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만 한정해야 한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는 것은 나의 행동이나 대처로 인해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그 걱정이 오늘 나의 주도적인 삶에 영향을 주게 허락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의 친구는 세 종류가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순함을 가르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나에게 자립심을 가르쳐 준다. -딩거(J. E. Dinger)"
쉘 실버스타인 (Shel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마지막 장을 보자.
"무언가 너에게 주고 싶은데……. 내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나는 그저 늙어 버린 나무 밑동일 뿐이야. 미안해……."
"이젠 나도 필요한 게 없어. 그저 편안히 앉아서 쉴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몹시 피곤하거든."
"아, 그래."
"자, 앉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동이 그만이야. 얘야. 이리 와서 앉으렴. 앉아서 쉬도록 해."
소년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나무는 사랑하는 소년의 필요를 모두 들어주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소년의 지독한 자기중심성이나 보기에 따라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나무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접어두자. 초점은 나무가 ‘행복해했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이용만 당한 마당에 억하심정도 없단 말인가? 나무의 행복은 그가 ‘주도적’으로 행동했다는 데 있다. 그는 소년의 필요를 알고 싶어했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이용당했다는 외부의 시선과 달리 그는 ‘주고 싶은 욕구의 실천’이라는. 자기주도권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행복할 수 있었다.
바람과 해 : 이솝 우화 이야기
바람과 해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경쟁을 했다. 바람은 강하게 불어 외투를 벗기려고 했지만 나그네는 오히려 더 단단히 외투를 붙잡았고, 이어 해가 따뜻한 온기를 계속 내리자 더위를 느끼고 외투를 벗었다.
‘외투를 벗게 하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바람은 철저히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했다. 나그네가 어떤 특성을 가졌던지 상관없이 강력한 힘으로 외투만 뺏으면 되었던 것으로, 이런 경우 나그네는 존중 받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당하는 입장이 된다. 반면에 해의 방식은 나그네의 특성을 파악하고(체온이 올라가면 더위를 느낀다) 그에 따른 방법으로 온기를 공급함으로써 나그네의 자기 주도적 행동을 유도해 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그네의 특성을 존중하여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판단을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기다림으로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자기 주도성 = 선택의 권리
어떤 상황에 대한 해석은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하다.
어떤 해식을 붙일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존재의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다.
부모에게 챙김을 받지 못했던 자녀가
'엄마가 나한테 함부로 해서 지금 내가 이 지경으로 만사에 자신감이 없고 주눅이 들어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엄마가 나를 챙기지 않아서 결국 내 힘으로 사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게 됐으니 소홀한 췩브 받은 것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향후 이 사람의 인생을 영위하는 방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피해자는 약하다. 피해의식을 갖는 사람은 자신을 약하다고 단정한다. 즉, 자기 주도성을 포기한 사람인 것이다.
Self gaslighting
가스리이팅 당했다는 말은 유행어 수준으로 쓰인다. 심지어 자신과 다른 의견을 우기는 상대방한테도 나를 가스라이팅한다 고 비난하는 판이다. 존재를 훼손하는 그 행위를 때로는 우리 스스로에게 거침없이 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마음이 괴로울 때 ‘나는 이것밖에 안돼’ ‘나 같은 건 살 필요가 없어’ 라는 등의 자신에 대한 심각한 모욕적인 생각이야 말로 가스라이팅 그 자체인 것이다. 스스로 이런 결정을 해 버릴 때 타인에 의한 가스라이팅에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