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쌤 Apr 28. 2024

나이는 어떻게 의미를 지니나

한국어교사 되기 1년 프로젝트

  은퇴 후 할 일 중 중요한 하나는, 코이카 해외 봉사단 한국어교사로 파견 나가 외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한국어교사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국어교사 30년의 경력은 한국어교사와 상관이 없단다.

도전한다!   


< 2023.1>  앉아서 강의 듣기


 1.

 대학교 내의 ‘한국어교원 양성과정’이 코로나로 3년 동안 개설되지 않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다른 방법을 찾았다.

 교육 기관의 자격이 인증된 학원에서 120시간 수업 이수해야 하고, 그러려면 약 40일 강의를 꼬박 들어야 하고, 그 후에야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1차 필기시험과 2차 시험(면접)이 있다. 모두 합격하면 국립국어원에서 자격심사를 한 후 문체부장관이 부여하는 3급 자격증이 나온다. 이 기간이 꼬박 1년 걸린단다. 길다.


  2.

 수강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내일 배움 카드’를 신청하고 학원에 접수한다.

이 학원은 120시간을 넘어 139시간 강의로 개설했단다. 수업 실습 때 외에는 집에서 줌으로 듣는다. 열심히 공부하면 모두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첫날 자신감 뿜뿜 심어준다. 그러나 교재를 보니 양이 매우 많고 공부할 내용의 범위가 장난이 아니다.

 한국어의 모든 것! 한국 문학의 모든 것! 언어학과 교수법의 모든 것! 한국문화의 모든 것! 심지어 한국의 역사까지…….

헉, 이 많은 걸 공부해야 하는겨?


  3.

  강의 삼 일째, 난 뻗는다.

 매일 10시부터 3시까지 수업을 듣는다.

 줌 수업으로 노트북에 집중하랴, 머리로 내용 이해하랴, 계속 앉아있자니 엉덩이뼈가 어떻게 되는 것만 같은 통증에 안절부절못하겠다.

 앞으로 약 40일의 시간들, 이게 가능할까?

급 자신 없음과 급 회의가 몰려온다.


 4.

 어제 한국어학 전반에 걸친 문법을 개괄하는데 같이 수강하는 사람들이 멘붕에 빠진 것 같다. 모국어는 문법을 잘 몰라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문법을 그렇게 자세히 알 필요가 없었던 거지.

 많은 시간이 지나 다른 나라 사람을 가르치겠다고 느닷없이 우리 문법을 다시 배우는 어른들의 난처함이 막 느껴진다.


 < 2023.2월 >  공부가 할 만하다


 5.

 수업에 재미가 붙었다. 엉덩이가 너무 아파 장시간 앉아있기 고통스러운 것은 푹신한 침대에 옮겨 앉든가, 식탁에 컴퓨터 의자를 갖다 놓고 앉든가 이런저런 살 방도를 찾으니 견딜 만하다.


 한국어문법으로 들어가면서 어렵지 않게 진도 빼고 있다. 국어국문학 전공에다가 국어교사를 30년 했다는 것이 ‘완전 개이득’이 되고 있다. 학교문법과 한국어문법의 차이들이 발견되고, '외국인을 가르치는데 이게 왜 필요한 거야?' 하는 것들이 적지 않아 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전공하지 않은 다른 수강생들의 생고생에 비하면 참을 만하다. 참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수업 듣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나중에 시험 대비 교재를 샅샅이 뜯어먹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심란하겠다.


  6.

  8월에 1차 필기시험이 있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모든 것 잊고 놓고 놀고 쉬다가 시험 앞두고 2,3개월 집중적으로 시험공부를 할 예정이다. 일 년을 온전히 시험에 쏟는 게 아깝긴 하지만, 오랜만의 공부가 재밌기도 하고, 내 몇 년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고,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위한 과정이니 고민은 접는다. 하여 오늘도 공부한다.


   7.  

  한 유투버가, 돈을 벌 생각을 하거나, 안정적으로 일을 하고 싶거나, 국내에서만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한국어교사’를 추천하지 않는단다.

 돈을 많이 벌 생각을 하지 않거나, 외국인과 만나기 좋아하거나, 해외에서 살아도 되는 사람, 돈보다 하고 싶은 일을 의미 있게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추천한단다.

 “바로 나네!”


  어제 또 다른 유튜브를 보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젊은 한국어 교사가 초급 학습자에게 문법을 열심히 설명하는 장면이다.

기계적인 문법 수업이 나를 완전 재미없음의 경지로 몰아가고, 내가 저걸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속이 매슥거렸다.

 그냥 말 통하는 우리나라 중학생과 국어 수업하는 게 낫겠다. 내가 외국 사람들에게 몸짓발짓 해가며 재미없는 문법을 설명한단 말인가. 그런 수업을 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뭔가 잘못 생각한 거 아니었나?


 밖으로 나가다. 찬바람 쐬며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심호흡하고…….

 시험은 예정대로 준비하자. 일단 시험은 붙고 그 이후는 나중에 생각하자.


 8.

 수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다음 주 화요일에 수업 시연을 하면 끝이다.

 녹화한 영상 보면서 빠진 수업 보충해 듣느라 머리가 쉴 틈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다 와 간다. 수업 시연은 내가 제일 먼저 해야겠다. 수업하는 것은 자신 있으니까. 내가 먼저 하면 다른 이가 좀 편하지 않을까?


9.

 낮에 수업 듣고, 밤늦도록 결석한 날 녹화영상 보고……. 정말 젊은 날 이리 공부했으면 뭐라도 했겠다. 늦은 나이에 참 애쓴다. 주변에 이렇게 늦은 나이까지 공부하는 사람을 잘 보지 못했으나, 멀리는 아주 많은 걸 안다. 주변 지인들은 나보고 대단하다고 한다. 뭐, 할 만하고 재미있기도 한데, 나, 정말 늦은 나이인가…….


< 2023. 3월 > 코이카 지원


10.

 한국어교육 교사 파견 모집 공고가 뜨다. 7월 파견 예정, 라오스, 태국, 키르기스스탄...

주로 대학 한국어과에서 가르치는 것 같다. 재밌겠다.

 1급 정교사에다 30년 교직 경력은 서류심사 때 높은 가산점이 있단다. 라오스나 태국으로 가면 좋겠네. 시험 끝내고 내년에 떠나면 좋은데, 이왕이면 빨리 갔다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원서도 안 냈는데 이미 된 것 같이 상상이 흘러넘치고 어찌할지 마음이 분주하다.


11.  

 어제 늦게 코이카에서 파견 예정인 학교들을 찾아보다.

라오스는 국립대학 한국어학과.

일은 완전 전문가 수준의 일을 요구하는데, 정식 교수를 안 뽑고 웬 봉사자를 뽑는담? 그 구조가 뭔지 모르겠다. 수업, 토픽 시험 준비, 동아리 활동, 한국문화 수업, 요리수업, 주민들에게 수업, 커리큘럼 짜기, 교재 만들기, 게다가 영어 가능자.

이게 봉사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혹시 젊은이를 원하지 않을까?


12.

 코이카 지원동기 ‘자기소개서’


 "중학교에서 30년 아이들과 함께 신명 나는 국어교사로 살았습니다. 문학을 좋아했고, 국어 선생님이 꿈이었고, 저는 그 꿈을 이룬 행복한 선생님이랍니다.

 기쁨이 옅어지고 타성에 젖은 제 모습을 보면서,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교사 이후 도전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자며, 정년을 10년 앞두고 이른 은퇴를 했습니다.


 국어를 공부하며 가르치는 것! 이것이 제가 좋아하는 것이고 제일 잘하는 일이랍니다. 국어선생님으로 지냈다는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고 축복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누린 만큼 나누는 일을 생각합니다. 코이카는 은퇴 전부터 맘속에 담아둔 곳입니다.

 몇 년 전 혼자 떠난 여행지의 머물던 집에서 대학 진학을 앞둔 여학생,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을 만났습니다. 그 아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게 됐답니다. 전공자인 선생님을 만난 그 아이는 완전 행운이었겠지요? 그러나 제게도 그 못지않게 큰 의미를 준 만남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중학생 아닌 성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상당히 재미있고 의미 있겠다 싶은, 깊은 인상을 준 경험이었습니다.


 제1 지망 국가인 라오스는, 그들의 문화와 분위기가 매우 인상적이어서 두 번 방문한 나라입니다. 파견국 라오스 이름을 봤을 때, 게다가 국립대학 한국어학과라니! 이번 모집이 운명이 아닐까 확 당겼습니다.

 나눔과 내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 갚음의 기회가 드디어 왔습니다. 그런 의미로, 떨리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원합니다."


< 2023. 4월 >


13.

  코이카 서류전형 합격!

 약 5 배수 정도 뽑았다 한다. 한국어교육 분야는 경쟁률이 높다는 소릴 듣다. 마음이 뭔가 석연치 않다.

 봉사활동 하러 가는데, 경쟁률이 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봉사활동 맞나? 서로 안 가는 곳에 가는 것이 봉사 아닌가? 다 가고 싶어 하는 곳에, 그런 일에 사람이 몰려 경쟁을 해야 하는 거라면, 안 가는 게 맞지 않나?

 “사람이 없으니 내가 기꺼이 갈게요” 하는 게 봉사지, 갈 사람 많은데 “거기에 나 꼭 보내줘요!” 이게 맞나? 회의가 드네. 뭔가 찜찜한 마음이 이거였다.

 봉사가 아니라 나의 욕심 아닌가? 나의 또 다른 이력을 위한?

물론 적합한 사람을 보내야 하니까 선별하기는 하겠지만, 내가 아니어도 적합하고 좋은 사람, 가고 싶어 하는 젊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가는 게 맞다. 나는 봉사의 의미로 간다지만 젊은이들에게 스펙의 의미도 된다는데…….


14.

  2차 면접을 보다.

 여러 가지 문법적인 내용, 초급 학생들에게 한국 문화를 어떻게 접목해서 가르칠 것인가, 현지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 대처 방법 등을 묻는다.

 평소 생각을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답하기는 했지만, 답변의 정확도도 분명치 않고 면접관의 반응도 시원치 않은 것 같다. 될 것 같기도 안 될 것 같기도 한 분위기, 운명이다.


 제주 여행 중에 메일 확인하다. 코이카 2차 불합격.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잘됐다. 순리대로 된 것 같다. 적합한 사람을 뽑았을 게다. 난 경험이 전혀 없고 나이도 걸린다. 갈 사람이 많은 코이카는 이번을 기회로 깨끗이 접기로 한다. 내 계획 하나를 미련 없이 접는다.


 < 2023.7월 >


 15.

  한국어문법 기출문제를 다 풀었다. 간단치 않지만, 문제 유형을 감 잡다.

 이렇게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는 것, 언제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이런 공부, 자격증을 따기 위한 빡센 공부를 또 할 수 있을까?

 시험 2주 남았다. 여수에서 배드민턴 코리아오픈이 열린다. 보고 싶은 선수들, 경기들…….

1박 하고 준결승, 결승전만 보고 오기로 하자.

하루가 중요하고 아까운 시간이지만 보고 와서 굵게 집중하자.


 < 2023.8월 > 1차 필기시험


 16.

 이번 주면 공부는 끝난다. 온전히 두 달, 나의 열정과 기억력과 노력과 시간과 마음을 쏟아부었다. 내 사랑 국어와 문학과 여타 그와 관련된 내용을 다시 공부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재밌고, 감사하기까지 하다.

 이런 시험공부가 한국어 교사 양성이라는 목적에 맞는 타당성이나 실용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공부 자체가 만족감을 주고 있다는 이 초긍정 마인드가 내게는 의미라는 것.

 한 과제를 선택했고 내가 이것을 조절하며 준비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이렇게 공부할 여건이 된다는 것이 감사하다.


17.

 다른 것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토익이나 스페인어 이런 언어공부 말이다.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부담 없는 목표가 있고 머리를 쓰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좋지 않은가?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거야~”

공부를 제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훈화했던 말이다.

“너희는 공부만 안 했으면 좋겠지? 선생님은 공부만 했으면 좋겠어.”

 헐~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그때 아이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풋~


18.

  시험이 끝났다. 무지 애썼다.

 목 디스크 걸릴 것 같다. 9시부터 3시까지 꼬박 시험을 치르는 동안 목이 아파서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장시간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것이 복병일지 몰랐다.

 ‘앞으로 무슨 시험 봐볼까?’ 했던 생각이 싹 사라졌다. 까불면 안 되겠다.

 점수는 평소 편하게 보던 수준으로 나왔고 과락이 없으니 1차는 합격할 게다. 하나는 해냈다.

 2차가 남았으나 일단 9부 능선은 넘은 것 같다. 잘했다!


 19.  

  제주도 한 달 걷고 와서 일주일간 빡세게 준비하여 2차를 보면  될 것 같다.

 마음이 한가하다. 몸도 한가하지. 일단 보고 싶은 책을 보고, 글을 좀 쓰고 팬플룻 좀 부르고 노래 좀 부르고 카페에도 가고, 무엇보다 이런 무더위만 좀 누그러지면 맨발 걷기! 맨발로 걸을 거다. 안산 황톳길부터, 샛강 또 안산의 산길들을 맨발로 걸어볼 거다. 기대된다.


< 2023. 11월 > 2차 면접 구술시험


20.  

   일주일만 집중해서 공부하겠다고 남겨둔 것이 일이 생겨 하루 날아가고 딱 5일 남았다.

 어떤 이가 인터넷에 예상 문제 정리해 놓은 것을 보고 당황하다. 답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음을 알다. 공부할 것이 너무도 많음을 알다.

올해 떨어질 수도 있겠다 싶고, 그러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아까울까 하는 생각에 ‘정신 붕괴’ 오다.


 학원에서 면접 대비 한 달 특강이 있다는 안내가 오고, 학원 선생님이 “선생님, 한 달은 준비해야 해요!”라고 문자가 왔을 때는 ‘설마’ 했었는데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는 지경이다.


  2차 면접시험은 세 가지 서술형 질문이 나온다.

 1차 필기는 외국인에게는 별 필요하지 않은, 구석에 있는 것도 외워야 하고 아주 쪼잔한 공부를 했다면, 2차는 거시적으로 뭉텅이로 외우거나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일주일이면 될 줄 알았는데, 약속에다 예상치 않은 일까지 겹쳐 일주일도 안 되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이 놓여있다.

잘난 척하고 여유 잡고 좀 건방을 떨었단 말이네…….


21.

 스터디카페로 와서 두꺼운 책 한 권 훑다.

예상 문제에 따라 답을 정리한다. 이것을 외우거나 온전히 이해해서 말로 풀어내야 한다. 가능할지 모르겠다.


 내일과 모레 문법을 다 훑고 정리하고 말할 수 있게 준비하고, 금요일은 교사의 자질 적성 부분을 정리하고 토요일 면접을 봐야 하는데, 가능할까? 이것도 모르겠다.

 내년에 다시 보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단 생각에 다시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일단 해보기로. 방법 없다.


22.  

 어제, 머리가 어찔하여 또 어지럼증이 도지나 염려가 이는 중에, 저녁에 문득 인터넷에 어떤 정보가 있지 않을까 떠올라 뒤지는데, ‘일주일 만에 때려잡기!’ 뭐 이런 제목으로 2차 면접 대비용 교재가 있다. 심지어 ‘하루에 때려잡기’ 이것도 있는 것 같아 찾아보니 절판 됐단다. 그래 하루는 좀 심하다. 일주일이면 나도 기회가 있었던 건데, 좀 일찍 찾아볼 것을……. 이제는 일주일이 아니라 삼일 남았다. 삼일!


 인터넷 주문하면 오늘 밤에나 온단다. 그러면 이틀밖에 안 남은 건데, 너무 늦다. 아들이랑 상세히 들여다보니 e북이 있단다. 바로 구입해서 노트북에 깔다. 12시 다 되어까지 집중해 읽다가 안심하다!! 내가 하려던 것을 다 정리해놓고 있는 것이었다!

 두꺼운 책을 보며 읽고 정리하고, 그것을 가지고 연습해야 하는 건데, 이 ‘때려잡기’ 책이 그런 질문과 답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일단 한번 읽어보면 감이 오고, 내용도 정리가 되겠다. 야호, 살았다!  

 시간을 쪼개 써야 하는 상황에서 ‘일주일 만에 때려잡는’ e북을 구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엄마가 합격하면 한 턱 쏜다!


23.

 스터디카페 3일째,

오늘 하루 마무리 하고, 대답할 내용으로 정리하고 내일 연습하고, 토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된다.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아도 있는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 맞고, 결과는 운명이고. 이렇게 생각한다.


24.

 세 명의 면접관이 자애로운 얼굴로 질문을 한다. 우리 고생한 걸 아는 듯한 표정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시험준비생을 위해 면접 문제를 소개하면,)


(1) 철수가 우리 반 반장입니다. 철수는 성실합니다. ‘가’와 ‘는’은 어떻게 쓰였을까요?

(2) 토의를 하는데 유난히 소극적이고 말을 하지 않는 학생이 있을 때 어떻게 하실까요?

(3) 다문화 학생을 어떻게 가르치실까요?


 면접관들이 답변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봤으니, 흠, 무난히 합격하지 않을까.


 한해를 강의 듣기, 시험공부, 시험 준비, 1, 2차 시험 이렇게 보냈다.

발표 나면 자격증 신청하고, 내년에 어디서 봉사활동을 할지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될 게다. 장하다. 스스로에게 기특함을 느낀다. 잘 해내줬다. 전폭적인 응원과 지원을 해준 식구들에게도 고맙고…….

 이제 무엇을 하나.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한가해지고 평화롭다.

아무도 날 흔들지 않고, 나도 누구를 흔들지 않는다.


 한국어교육검정시험 합격!


 25.

 일 년 동안 애쓴 것이 결실을 이루다.

2차 면접 준비할 때 그 당황스러움을 ‘일주일 만에 때려잡기’로 마무리해서 기쁘다. ( 나중에 그 고마운 교재 제목을 보니 ‘때려잡기’가 아니라 ‘따라잡기’였다는 것! 그때 얼마나 당황했으면 책 제목이 그렇게 들어왔을까…….)

 모두 고맙다. 이제 내년부터 봉사할 곳을 찾으면 되겠다. 

안산에 간다. 친구들과 축하를 해야지.


 < 2024 2월 >  한국어교사 봉사활동


26.

 근사한 자격증이 폼 나게 등기로 배달되어 오다.

사진도 찍어놓고, 활동할 곳을 찾는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중도입국자녀를 위한 학교에서 일주일에 두 번 오전 두 시간씩 수업을 하기로 하다. 한국에 와서 처음 한국어를 배우는 진짜 초보들을 가르쳐야 한단다. 내게 너무 적합한 일, 적합한 시간, 적합한 장소이다. 감사하다. 잘해보기.


 27.

 멕시코, 페루,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러시아 등에서 온 일곱 명의 아이들이 있다. 부모를 따라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 중고등학생의 청소년이다.


 아이들에게 정말 중요한 시간들인데, 처음인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자료를 찾고 뒤지고 분주하다. 자료들을 보니 어느 정도 우리말을 알아듣는 것을 전제하고 구성되어 있다. 한국어, 한글 한 개도 모르는 아이들인데……. 한 나라의 아이들만 모여 있다면  번역기를 돌려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여섯 나라의 아이들을 우찌...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란


28.

 손짓 발짓도 하며, 필요할 땐 아주 간단한 영어 단어를 쓰며, 그러나 가능한 최소한의 우리말 사용으로 단모음부터 시작한다.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 내고, “따라 하세요. 아! 어!~~”

  한글 위대하다!

 몇 시간을 마치고 나면 음절을 만들고 단어를 발음한다. 세종대왕이 아무리 우둔한 자라 할지라도 며칠만 배우면 글자를 익힐 수 있다고 예견하신 바다.


29.

 부모 따라 먼 나라에 와서 남의 언어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애틋하고 기특하다. 잠시 왔다 가는 아이들이 아니고,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고 한국 학교에 다녀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더 그렇다. 언제 이 언어를 다 익힐꼬. 

높임말들, 조사와 어미들, 한자어들이 섞인 낯선 언어를 배우는 것이 쉽지 않을 게다.


30.

  아이들의 눈이 살아있다. 인도네시아 친구 파흐리는 푸른 흰자위의 커다란 눈을 가진 매우 진지한 녀석이다.

 오늘은 이중 자음으로 된 받침을 배우면서 간단한 회화를 연결해서 배운다.

“있어요”, “없어요” “많아요”를 예로 든다.

“선생님이 물어요. 있어요, 없어요, 많아요 중 대답해요.”

“파흐리 돈 있어요?”

파흐리가 “없어요.” 한다. 녀석은 카드만 가지고 다닌다는 표시로 카드를 보인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묻는다.

모두 앞 친구가 대답한 걸로 안전하게 대답한다.

 “없어요”

이런.....


 “선생님이 강도예요?”라고 인도네시아 말로 번역기를 들려준다.

파흐리 놀라서 손을 막 젓는다.

다른 친구에게도 그들의 언어로 번역기를 들려준다.

모두 다 똑같이 놀라서 아니라고 손을 젓는다.

“그런데 왜 다 없어요! 해요?”

아이들이 알아듣고 웃는다. ㅋ


아이들에게 묻게 한다.

“선생님 돈 있어요?” 묻는다.

나는 손을 크게 벌려 대답한다.

“ 선생님 돈 많아요!”

모두 환하게 웃는다.


 하루하루 예상치 못한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긴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도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아이들이 공감하여 웃음 터뜨리는 일들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밌다.

  식탁에 앉아 식구들에게 얘기해 주면 역시 신기하고 재밌어한다.


 31.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에게는 고민하지 않고도 쉽게 쓸 수 있는 말들, 발음들이 이들에게는 문법의 영역으로 가르쳐야 하고 그것을 익혀야 말을 바르게 쓸 수 있다.


 시험공부를 할 때 집에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본 적이 있다.

 “ ‘엄마가 바쁘다.’ ‘네가 와라.’ 이 두 문장을 연결하면?”

 “엄마가 바쁘니까 네가 와라”

이렇게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그런데 외국인은,  

 ‘엄마가 바빠서 네가 와라’라고 만들기도 해. 같은 이유인 '~아서'는 왜 안 될까?”

아이들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그러게?” 이런다.

 외국인들은 연결어미로 문장을 이을 때 자연스럽지 않은 비문을 만든다. 그들에게는 문장 연결에 제약을 갖는 어미를 설명해야 할 게다.


 <2024년 4>


 32.

  이 아이들이 어느덧 기초반을 떼고 있다. 간단한 문장을 받아쓰기하고 발음하고 응용하여 말하고…….


 라마단 기간이라고 금식을 했던 파흐리는 힘이 없이 수업을 받았었다. 

"선생님은 라마단에 대해 알고 싶어." 

파흐리는 번역기를 돌려 아주 길게 설명을 하고 자신이 하고픈 말을 써준다.

"......저는 ... 기도를 해요."


 그 진지했던 파흐리조차 이제 까불거리며 수다쟁이가 되고 있다. 물론 인도네시아어, 영어, 한국어를 섞으면서 떠드는 수다다. 그 커다랗고 순한 녀석의 눈빛엔 중학생의 장난기가 서려있다. 귀엽고 기특하다.


 배움이란 고단하기도 하지만 좋은 것이다. 이 녀석들이 빠르고 정확하고 즐겁게 익힐 수 있도록 나 또한 신나게 같이 배우고 가르칠 것이다. 이것이 재미고 의미일 게다.


33.

 오랜만에 안산을 걷다.

오래 서 있는 그 나무, 위로 쭉쭉 뻗은 당찬 나무에 새봄의 잎이 푸르게 다시 퍼지고 있다.

이전 29화 이런 '공간'과 '삶'을 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