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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쌤 Dec 11. 2023

우울 대신 슬픔을 택한다

정우성의 눈빛을 대하는 방식

 그날 점심, 국회도서관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수많은 사람이 나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뭔 일이랴……, 내가 깜짝 놀라는 순간, 그들에게서 바로 민망한 웃음이 터졌다. 여기 소강당에서 열리는 행사에 정우성이 오는데, 그 멋진 배우가 타고 내려와야 할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나타난 것이다. 당시 한창 뜨거운 감자였던 제주 난민 문제에 관한 심포지엄 발제자로 정우성이 있었고…….

 하여 난 두 관심지사에 끌려 점심을 얼른 먹고 관객으로 참관했다.  


 사람들이 술렁이고, 드디어 그가 나타났다. 입구로 들어오는 그의 훤칠함과 세련됨을 보고 기분 좋게 감탄했던 느낌, 발제를 할 때의 진중한 목소리에 대한 기억, 물론 그날 그의 생각들에 공감하고 동감하는 내용과 맞물렸을 것이다.


'서울의 봄'

사람들은 배우들의 연기와 긴박한 구성으로 재미있는 영화라 하지만, 내겐 슬픈 영화로 남는다.

전두광에게 흥분하거나 그놈들에게 집중했다면 난 매우 우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난 세상을 그렇게 보지 않기로 했다.

이 시대를 살면서 우울함에 빠지지 않고, 희망을 보며 단단하게 살기 위해 내 나름 터득한 방법이다.


 "빛나는 소수에게 집중하기!"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적을 한 놈들에게 성질내지 않는다. 모두가 친일을 한 것 같이 그들은 여전히 똥칠을 하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한 이름 없는 별들, 가혹한 세월을 살아낸 이들에게 집중한다.


 국어 시간에 시를 가르칠 때도 그랬다.

문학의 암흑기에도 윤동주 이육사에 집중한다.

그들이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이런 빛나는 소수의 별들을 가르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슬플지언정 우울하지는 않다.


 영화 ‘수라’를 볼 때도 그랬다. 개발 논리로 갯벌의 많은 생명을 무참히 죽이는 인간들에게 절망할 뻔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화장실에 가서도 계속 가슴에서 '컥' 터져 나오는 것은 왜일까?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사람들, 땅을 지키는 사람들, 오랜 세월 고단한 몸으로 연대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소수의 별들을 보면서 인간에 절망하지 않게 된 것, 인간에게 고마운 것,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나는 거다.


 다시 '서울의 봄'

심박지수가 오르거나 혈압이 상승하거나 분노게이지가 높아지지는 않는다.

눈발 날리는 '서울의 겨울' 앞에 선 정우성의 절망의 눈빛, 깊고도 처연한 눈빛이 자꾸 떠올라 여전히 나는 슬플 뿐이다.


 자기 자리를 지켜줬던 소수의 빛나는 사람들,

영화를 보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공감하는 수백만의 상식적인 사람들이 고맙고,

하여 ‘정의’를 얘기하고 그런 봄날을 꿈꿀 수 있어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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