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관적인 경험에 의해서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집필에 힘이 되는 응원 및 댓글 감사드립니다.
1달 전에 일어난 일이다.
여느 때와 같이 아이가 유치원에 가야 하는 날은 항상 바쁘다. 모두 다 같이 일어나서 아직 잠이 덜 깬 비몽사몽 상태에서 장모님에게 전화가 왔다.
아내와 같이 산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침에 전화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전화를 오는 것을 보고 필자는 바로 느껴졌다. ' 올 것이 왔구나 '
전화기 너머로 장모님의 울음이 섞인 대화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할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연락을 받기 1달 전에 할머님이 위독하시는 연락을 받았었다.
그때의 통화 내용으로는 " 할머님의 상태가 위독하시다, 그래서 집중 치료실에 들어가 계신다. 주위에 계시는 친한 분들에게는 이미 연락을 드렸다 "였다.
할머님의 연세가 많으셨기에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 전화를 받은 아내는 자리에 앉아서 너무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필자는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이렇게 말했다.
" 여보 뭐 해? 비행기티켓 알아보고 바로 가야지 " 아내는 할머니가 위독하시는 것만으로 일본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랬던 이유가 한번 다녀오는데 경제적 지출이 컸기 때문이다. 아직은 엄마를 찾는 어린아이가 있어서, 혼자만 일본에 다녀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대신 필자는 할머님의 위독하시는 것만으로 같이 가는 것보다 남아 있기로 하고, 아내와 아이만 일본에 가는 것으로 했다. 아침에 전화를 받고 그날 밤에 떠나는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하고 준비를 했다. 준비를 하는 도중 필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 자유 '라는 단어가 필자를 들뜬상태로 만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색하면 안 된다. 최대한 티 내면 안된다라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아내는 할머님을 만나기 위해서 일본에 가고, 3주 동안 체류했었지만 병원에서 할머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고작 1번이었다. 할머님이 계시는 병원이 노인요양전문 병원이었는데 할머님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면역을 위해서 외부인의 면회는 제한되어 있는 곳이었다. 아내가 해외에서 왔다고 사정하고 잠깐 만나 볼 수는 있었다. 아내가 할머님을 불렀지만 할머님의 반응은 없었지만, 4살 아이의 부름에는 할머님이 눈을 뜨고 아이를 쳐다봤었다. 병원 면회를 다녀오고 나서 아내는 필자에게 일본에 보내줘서 너무 고맙다고, 덕분에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말을 해줬었다.
그렇게 해서 호주 멜버른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 1주일 뒤에 연락이 온 것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다 같이 일본에 가는 비행기 티켓을 바로 구매했다. 아내의 고향이 규슈에 있기 때문에 호주 멜버른에서는 직항으로 갈 수 없어 여러 곳을 경유해야 했다. 멜버른 - 시드니 - 도쿄 - 큐슈로 가야 했으며 비행시간만 15시간 이었지만 비행기 기다리는 시간, 공항에 미리 도착해야 하는 것 등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20시간 정도가 걸리는 길이였다. 이럴 때는 한국 또는 일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호주에서 사는 것이 별로라고 느껴진다. 가까워야지 가볼까 라는 생각이 들지, 너무 멀면 그런 생각 자체를 잘 안 하게 된다.
필자는 일본을 다시 방문하는 것이 3년 만이었다. 그렇게 긴 여정을 끝내고 아내의 고향에 도착했다. 장모님이 공항에까지 마중 나와 주셨다. 장모님을 오래간만에 만나는 건데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까 살짝 고민을 해봤다. 결혼 초기 때 일본에 방문했었을 때 필자는 돌아다니는 동안 장모님의 손을 잡고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아무 말을 안 하셨지만 나중에 장모님이 아내한테 따로 조심히 말씀하신 것이 있었다. " 사위가 손 잡아 주는 것은 너무 고마운데 본인보다 할머니 손을 잡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내가 하는 말이 길거리에서 그렇게 손 잡고 다니면 사람들이 불륜으로 본다고 했었다. 하긴 일본에 있는 동안에 남녀가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장모님을 맞이하게 됐고, 장모님은 필자를 안아 주었다. 일본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는 외국인으로 보기 때문에 해준 것 같기는 하다.
그렇게 우리들은 차량을 타고 곧바로 장례식장에 갔었다. 필자가 한국에서 장례식을 집적 경험한 것은 20년 전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한국의 장례식에 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예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데, 일본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하니 어떻게 될지 전혀 예상을 할 수 없었고, 일본의 장례식을 본 것은 영화에서 야쿠자들이 하는 장례식만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리가 없지 않겠는가... 호주에서 비행기 탑승하기 전에 아내가 필자한테 해준말이 있었다.
" 여보 한국처럼 울지 마 "
라는 말을 듣고 " 왜?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일본 장례식에서는 한국처럼 울지 않는다고 했었다. " 그럼 장례식에서 울음이 나오는 것을 참는 거야? "라고 되물었고 아내는 울음을 참지 않고 울어도 되지만, 한국처럼 울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 드라마 또는 영화에서 보면 한국 장례식에서는 사람이 쓰러지고 세상이 무너지듯이 우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아마 아내가 그런 거를 보고 필자가 크게 우는 것을 염려해서 그런 것 같았다. 20년 전 한국의 장례식을 기억해 보면 부모님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이 그렇게 우는 것이 기억난다. 아버지의 어릴 적 친구분이 오셨는데 아버님이 그 친구분에게
" 어이구 어떻게 왔어? "
" 어떻게 오긴 인마 버스 타고 왔지 "
이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필자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곧 아버지의 친구분은 자리에 앉으셔서 아이고아이고를 시작하시며 울기 시작하셨다.
' 방금 전까지 농담처럼 이야기를 하셨는데 갑자기 저렇게 울기 시작하신다고? '
그렇고 넋두리처럼 시작한 살풀이는 몇 분 간 이어졌었다. 젊었을 때 본 것인데 충격이어서 그런 건지, 처음 경험해 봐서 그런 건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일본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방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장례식처럼 넓은 공간에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런 것이 아닌 조그마한 방이었다. 아내 말로는 지금 장례식장에 사람이 많아서 임시적으로 작은방을 구했다고 한다. 방 한가운데에는 아내의 할머님이 누워계셨다. 그리고 하얀색 천으로 얼굴이 덮여 있었다. 한국이랑 다르다. 한국은 병풍 뒤에 모시거나, 방문하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모시는데, 일본은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방 한가운데에 누워 계셨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본 것이 있어서 관 속에 누워 계실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이불을 깔아놓고 그 위에 계셨고, 마치 주무시고 계시는 것처럼 보였다.
'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다고? 시체가 부패하지 않을까? 위화감이 들지 않을까? '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할머니 옆에 자리를 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덮고 있던 하얀 천을 들춰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위화감이 드는 것은 없었고 그냥 주무시고 계시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 하얀 천을 다시 덮어주었다. 그 옆에는 조그마한 탁자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차를 마시면서 수고했다, 와줘서 고맙다 등등 여러 말들을 필자에게 했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장모님 댁으로 돌아갔고, 장모님은 그곳에 남아서 주무신다고 하셨었다. 장례식장의 일정 때문에 2일 정도를 작은방에 계시다가 큰방으로 이동했다. 방을 이동할 때에 보니 할머니가 덮은 이불안쪽에는 여러 개의 드라이아이스가 있었다. 그리고 에어컨은 24시간 가동시켰었다. 그 당시 밖의 날씨가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님의 상태에는 변화가 없었다. 장례식장의 직원들이 와서 할머님을 조심스럽게 들것에 실어서 큰방으로 이동했다. 큰방은 다다미가 깔려 있는 일본 전통 형식의 방이었고, 여닫이 문이 있었는데 그 여닫이 문을 열면 수많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장례식 관 이 준비되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이불을 깔고 그 위에 할머님을 다시 눕혔다. 그리고 이불 안에 많은 드라이아이스를 집어넣었다. 이제 본격적인 장례식 절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장례식장 여자 직원분들이 큰 욕조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저걸로 뭐 하려고 그러지 라는 의문이 있었고, 곧 그들은 할머님을 씻길 준비를 했다. 플라스틱으로 된 큰 욕조 위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짜인 받침대가 있었다. 할머님을 들어서 그곳 위로 옮기고, 할머니의 머리도 감기고, 몸의 닦아 주시면 샤워도 해주셨다.
" 여보 저거 왜 하는 거야? "라고 속삭였고
" 마지막 가시는 길 이쁘게 하고 가시라고 준비해 드리는 거야 "라고 했었다
그렇게 할머님의 샤워가 끝나고 난 다음에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고, 하얀색 옷을 입혔다 그리고 할머님에게 화장을 해드리기 시작했다. 화장을 마친 할머님의 모습은 예전에 보던 평
소 모습과 다른 게 없었다. 이쯤 되니 그냥 주무시고 계시는구나 하고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보였던 사람들의 반응은 슬픔이 아니고, 할머니 이쁘시네 등등 보다 밝은 분위기였다. 할머님이 계시는 방안에는 티브이도 있었는데 티브이로 고시엔이라고 하는 일본 고등학교 야구시합을 시청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저녁에 문상객들을 받는다고 했었다. 아내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워낙에 장례식을 크게 해서, 할머님은 최대한 작은 규모로 하고 싶다고 하셨었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 및 친척분들만 방문하기로 했었다. 한국은 3일간의 기간을 정해두고 그 기간 안에 아무 때나 와서 조의 하면 되었지만, 일본은 문상객들이 방문하는 시간을 정해두었다. 문상객들이 방문하기 전에 할머님은 장례식 관에 들어가셨다. 화장을 곱게 하고 하얀색 옷을 입고 계셨다. 결혼식 때 아내가 입었던 하얀색 옷 하고 비슷한 것 같았지만, 할머님이 입으신 옷이 더 화려하다고 보였다. 방문한 문상객들에게는 답례로 조그마한 쇼핑팩을 챙겨주었다. 그 안에는 마실 수 있는 차, 간단한 다과가 들어가 있었다. 문상객들이 시간에 맞춰서 방문하면 스님이 온다. 스님은 외부 절에서 사시는 진짜 스님인데 한국 스님이랑은 느낌이 많이 달랐다. 스님이 염불을 외우는 절차가 있는데, 이것 때문에 문상객들이 시간에 맞춰서 오는 것 같았다. 염불을 외우는 시간은 대략 20분 정도가 되었다. 문상객을 받던 날은 그렇게 지나갔고 우리들은 모두 장례식장에서 잠을 청했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장례식을 올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문상객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이때 방문하는 문상객은 직계 가족 및 친척들만 참석하게 된다. 장모님은 최대한 작은 규모로 하고 싶어서 친척분들에게 안 와도 된다고 하셨지만, 친척분들은 왜인지 반드시 참석한다고 했었다. 이렇게 참석하고 나면 장모님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더 늘어나게 된다. 대접해야 할 식사도 늘어나게 되고, 사람들이 이용해야 할 교통편도 알아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작게 하기를 희망하셨던 것이었다.
친척분들이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하니, 막아낼 이유가 없었고, 다시 참석하였다. 전날밤에 왔었던 스님이 다시 오셔서 향을 피우면서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국 장례식에서 피우는 향이 아닌 다른 무엇가를 나무 숯 위에 올려놓으면 그것이 연기로 기화되는 방식이었다. 가운데에 할머니의 장례식 관이 놓여 있고, 그 뒤 단상에는 수많은 꽃들이 놓아져 있었다. 한국처럼 하얀색 국화가 아닌 여러 가지 색깔의 이쁜 꽃들이 꾸며져 있었다. 양 옆에는 깃대형식으로 명복을 비는 가족 및 친척들의 이름이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한국이 사용하는 한문은 옛날의 한문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한문 하고는 달랐다. 필자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스님은 염불이 끝나면 자리를 비우고, 후에 화장하러 갈 때에 같이 동행한다고 했었다. 스님의 절차가 끝나면 장례식의 사회자 ( 장례식장 직원 )가 할머님의 지난 과거의 행적과 말씀들을 읽어주신다. 이때 장모님이랑 아내는 울기 시작했는데, 한국처럼 떠나가듯이 우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흑흑하는 것처럼 우셨다. 일본어를 완벽히 못 알아듣는 필자랑 아이는 가만히 있었다. 장례식 참석자들은 스님이 앉았던 자리 뒤쪽애 의자에 앉아 있다가 차례대로 일어나서 할머니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러한 절차가 다 끝나고 난 다음에는 다 같이 일어나서 관 주위로 모여든다. 단상 위에 있던 이쁜 꽃들을 가지고 와서 할머니 관속에 넣어주면서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 이쁘네, 이쁜 옷 입었네, 좋은 곳에 가서 나중에 다시 보자, 그동안 고마웠었다 "을 이야기하면서 마지막 인사를 한다. 일본어를 못하지만 그 분위기 때문에 눈물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인사가 끝나고 나면 할머니가 누워계시는 관에는 수많은 꽃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리고 관 뚜껑을 덮는다. 여기에서 장모님이랑 아내는 크게 울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크게 운다고 해서 한국처럼 쓰러질 듯이 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관을 닫은 후에는 장례식 차량에 관을 싣고서 화장터로 이동하게 된다. 화장터에서 도착하고 나면 그곳 직원들이 관을 이동시켜주며, 화장대 앞에 잠시 대기한다. 장례식에 참석했었던 스님이 와서 마지막 염불을 외워주고 할머니의 관 은 화장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휴식장소에서 10분 정도 기다리게 된다. 필자의 할머니도 한국에서 화장을 하였다. 그때 화장을 할 당시에는 유리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장례식 관이 화장을 하는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불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필자의 어머니가 “ 아이고 저거 뜨거워서 어떻게 해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셨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런 단계까지는 보여주지는 않는다.
0
10분 뒤 화장을 마치고 나면 철판 위에 뼈만 남아 있는 상태로 가족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뼈를 담을 수 있는 조그마한 단지를 가지고 와서 그곳에다가 뼈를 담는다. 뼈를 담을 때에는 젓가락을 사용하며, 젓가락에서 젓가락으로 집어서 단지에 넣는다. 그래서 아내는 밥을 먹을 때 반찬을 대신 집어줄 때 젓가락에서 젓가락으로 옮겨 주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일본에서 젓가락에서 젓가락으로 넘겨받는 것은 뼈를 옮겨 담을 때나 하는 것이라고 했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철판을 보고 있자니, 이제 가셨구나라는 것이 다가왔다. 이렇게 하면 일본에서의 장례식 절차가 다 끝나게 된다.
한국에서는 장례 절차는 이승과 단절시키는 행위로 여겨져서 돌아가신 분은 가족 이외에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3일 동안 최대한 많이 슬퍼하고 끝낸다. 그리고 본인들의 삶에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한국에서는 곡소리 나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지만, 일본은 장례 절차는 돌아가신 분이 다른 곳으로 가는 절차이고 자신들의 삶에 계속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한국과 다르게 세상 떠나가라 슬퍼하지 않는다
처음 경험해 보는 일본 장례식 문화를 통해서 일본인들의 생활습관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차이점은 한국과 일본은 하나로 융합되기 어려운 점으로 연결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