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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담 Aug 16. 2023

자신을 알고, 때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사기열전 오왕 유비 편] 사기열전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오왕 유비(기원전 215년~154년)는 한나라 초기 오나라 지역의 제후왕으로 중국사에 유명한 오초칠국의 난을 주동한 인물입니다. 한국에서는 삼국지의 유비와 이름이 같은데, 공교롭게도 오왕 유비 이야기에 조조라는 인물까지 나와 삼국지의 조조와도 혼란을 줄 수 있어, 오왕 유비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삼국지 유비와 조조


오왕 유비의 한자는 劉濞(물소리 비)로서 현재의 중국어 발음으로 liú bì이며, 한국 발음으로 류삐에 가깝습니다. 삼국지의 유비 (기원후 161년~223년)는 오왕 유비의 사망로부터 약 300년 후 출생한 인물이며, 한자는 劉備 (갖출 비)이고 현재의 중국어 발음으로 Liú Bèi이며, 한국 발음으로 류뻬이에 가깝습니다. 중국 사람에게는 이름의 소리 자체가 틀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인식될 텐데, 한국 발음으로는 같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오왕 유비 이야기에 나오는 조조(기원전 200년~154년)의 한자는 晁錯이며, 현재의 중국어 발음으로 cháo cuò이며, 한국 발음으로 촤오추어에 가깝습니다. 삼국지의 조조(기원후 155년~220년)는 한자로 曹操이며, 중국어 발음으로 cáocāo이며, 한국 발음으로 차오차오에 가깝습니다. 이 역시 중국어 발음으로 다른 인물로 들리는데, 한국에서만 한자 독음이 같아 한국인만 혼선을 일으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나라 왕이 된 유비


오왕 유비는 한 고조(유방)의 작은형 유중의 아들로서, 유방의 조카입니다. 유방은 중국을 통일한 후 주요 공신들에게 수도와 멀리 떨어진 지역을 맡기고 왕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들에 의해 건국 초기 많은 반란이 있었습니다. 회남왕(현재 안휘성 및 장서성 지역) 영포가 반란을 일으켜, 형나라(현재 강소성, 절강성)를 병합하고 초나라(현재 강소성 북부지역)를 공격하자, 유방이 몸소 토벌에 나섰으며, 젊고 기개가 넘치던 유비가 고조를 수행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반란군을 토벌했지만, 형나라 지역을 맡았던 왕이 영포에 의해 죽고, 후사가 없었고, 백성들이 사나웠기 때문에 그 지역을 다스릴 만한 인물로 보이는 유비를 오나라 왕(현재의 강소성, 저장성지역)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유방은 왕인을 내린 후, 유비를 자세히 보니 모반의 상을 발견하였으나, 이미 결정한 일이라 바꾸지 않고, 모반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본국과 멀어지는 오나라


오나라가 위치한 지역은 구리가 많이 나는 곳으로, 이를 이용해 돈을 만들고,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어 세금을 걷지 않아도 나라가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한 문제 때, 오나라의 태자가 황태자와 술을 마시고 박이라는 놀이를 하였는데, 태자가 워낙 교만하였습니다. 놀이 중에 다툼이 일어나자, 황태자가 화가 나서 박판을 던졌는데, 공교롭게 태자가 맞아 죽게 되는 사고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비는 한나라를 원망하며, 본국의 요청에도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고, 본국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며 음모까지 꾸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에는 이를 민감한 사안으로 다루었으나, 이를 용서하고 나이 든 오왕을 예우하여 입조 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을 하였습니다. 오왕은 음모를 꾸미지는 않았았으나, 구리와 소금으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다른 군과 국에서 도망온 자들을 숨겨주고 내주지 않았고, 재능 있는 이들을 모으자, 오나라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경제의 측근 조조


조조는 문제와 경제 시대의 신하로서 준엄하고 강직하고 냉철한 사람으로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였지만, 조조가 제후국들의 봉토를 줄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자는 상소에 대하여는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황태자와 좋은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결국 황태자가 황제가 되자 조조를 총애하고 그의 의견을 다른 누구보다 더 더 듣게 되었습니다. 조조는 자주 신하들을 물리치고 황제에게 의견을 말했으며, 그때마다 황제가 그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각박한 면이 많았고, 다른 신하들과는 좋은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 때는 제후왕의 봉지를 삭감하는 정책을 펼칠 수 없었는 나 경제 시대에는 조조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후왕들의 이런저런 잘못들을 핑계로 그들의 봉지를 삭감했습니다. 이에 모든 제후왕들이 분노와 함께 두려움을 느꼈고, 오왕 유비는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습니다.



한 경제


오초칠국의 난과 독단적인 오왕


오왕 유비는 제후국들의 봉지 삭감으로 불만이 가득 찬 동쪽의 일곱 제후국, 오(吳), 초(楚), 교서(膠西), 교동(膠東), 치천(菑川), 제남(濟南), 조(趙)을 설득하여, 조정의 간악한 조조를 죽여 한나라를 다시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경제는 제후왕들을 달래고자, 무고한 조조를 죽였으나, 제후왕들의 반란이 멈출리는 없었습니다.  


오나라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전녹백을 대장군으로 삼았고, 전녹백은 군대 전체가 서쪽으로 진출하기보다는 자신에게 5만의 군사를 주면, 남부지역을 점령 후 다시 오왕의 본대와 합류하겠다는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나라 태자가 군사를 나누면 배반할 수 있다고 하자 전녹백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오나라의 젊은 장수 환장군은 오나라는 보병이 많아 험준한 지형에 유리하고, 한나라는 기병과 전차가 많아 평지에 유리하니, 서쪽으로 진출 시 손에 넣지 못하는 성읍들을 그대로 두고, 빨리 이동하여 낙양의 무기고를 차지하고, 식량이 많은 오창을 점령한 후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한나라 군대를 맞서면 한나라를 무찌르지 않고도 천하를 지배할 수 있음을 말하고, 만약에 늦은 속도로 서쪽으로 진출할 경우 들판에서 한나라 군대를 만나면 일이 실패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왕이 이를 나이 든 장수들에게 물으니 좋은 계책이 아니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왕이 모든 군대를 모아서 독단적으로 통솔하였습니다.


한나라에서는 조후를 장군으로 삼아 반란군을 맞도록 하였으며, 조후는 등도위가 제시한 계책에 따라, 양나라로 오나라를 군대를 맞서게 하고, 본인도 창읍에 진지를 세워 사나운 오나라 군대와 싸움을 피하고, 본국에서 멀리 나온 그들의 식량 보급로를 끊고자 했습니다. 오나라가 양나라를 세차게 공격하자 양나라는 조후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도와주지 않자 황제에게 사자를 보내 조후를 헐뜯자, 황제가 조후에게 양나라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후는 듣지 않고 자신의 진지를 지키기만 하였습니다. 초기에 기세 좋게 진격하던 오나라는 차츰 보급이 힘들어지고 싸움에 지치자 점점 패전을 하기 시작했으며, 조후와의 결전에서 패하자 사졸들이 흩어지자 오왕 유비도 동월로 몸을 숨겨 흩어진 군사를 다시 모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나라에 회유된 동월은 오왕을 속여 그를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반란에 참여했던 초나라 왕은 전쟁에서 패하자 자살하고, 교서, 교동, 치천왕도 죽임을 당하고, 봉국들은 한나라에 귀속되었습니다. 조나라만 열 달 동안 버텼으나 자살을 하였고 제북왕만 협박으로 참여하였다 하여 치천왕이 되었습니다. 





오왕으로 유비를 임명할 때, 유방이 모반의 상으로 알아봤다는 것은 후세의 역사가들의 말일 수는 있으나, 오왕은 초기부터 본국과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오만했던 그의 아들은 황태자와 다투어 사고사까지 당하게 됩니다.


오왕 유비는 반란 초기의 세력은 한나라에 필적할 수준이었으나, 그의 주위에는 좋은 인물이 없었고, 전쟁 시 자신이 임명한 대장군조차 믿지 못하고, 중요한 전략조차도 이를 제안한 장수가 젊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전쟁에 패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한나라의 조후 장군은 자신이 신뢰하는 등도위의 계책을 받아들여, 황제의 지시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계책을 유지하여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오초칠국의 난이 발생한 시기는 한나라 초기 발생한 반란이 모두 진압되고,  태평성대를 이르는 말인 문경지치(문제와 경제의 치세)의 시대인 만큼 매우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특히, 경제의 한나라는 이미 초기 한나라 설립 시의 불안정한 시기를 지나 안정화된 시기로 반란이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한 제후왕의 불만만으로 국가를 뒤엎을 반란을 성공시키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작은 동력이었을 뿐이었으며, 반란군은 결국 손쉽게 제압당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시기를 읽지 못했던 유비는 스스로 자신이 가진 것을 잃고, 허무하게 죽음을 자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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