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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Feb 07. 2024

재능은 안 주셔도 돼요

그냥 할 거니까요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이석원


p. 24 장 자크 상폐


자기는 다른 이들처럼 그림에 죽고 못 사는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평생 의무감에 그림을 그려왔을 뿐이라고.

(...) 알고 보니 상페는 원래 다른 일을 하고 싶었으나 거기에는 소질이 없어 부득이 택한 것이 그림이었다. 그랬던 일이 평생 일이 되고 돈과 명성까지 가져다주었지만 끝내 열정마저 주지는 못했던...


사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시작한 작업이 진도를 못 빼고 난항 중일 때(항상) 있었어요. '재능도 열정도 모자라니 그만할까?' 슬그머니 손 놓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이 문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재능이 있지만 그림에 열정이 '없었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숙명을 느낀 것도 아니지만 '하였다.' 삶의 어떤 의무처럼. 이 말을 듣고 내가 너무 거창한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어요. '명장이 되는 길을 걷겠다.' 생각한 것처럼. 앞으로 '나는 이 길만을 갈 테다. 무엇도 나를 말릴 수 없다..'는 비장한 마음으로요. 아마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의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얘기에 매몰되어 그런지도 모르죠.


폴 오스터 작가가 <빵 굽는 타자기>에서 작가에 대해 말한 부분이 있는데요. 20년쯤 전에 읽은 이 문장에 매료되었고 작가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무릇 작가라면 이러해야지..' 하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된 것 같아요.


 p.5

내 꿈은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넌 끝났어.'라는 말을 이렇게 근사하게 할 수 있다니. '넌 작가 나부랭이로 죽을 운명이니 받아들이라고' 하는 이 말이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작가로 죽지 못한다면 너무 시시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깊은 슬픔'까지 느꼈다면, 그때 제가 얼마나 겉멋이 심하게 들었는지 아시겠죠? '신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저 '어떤 선택에서 빗겨 났다'는 것에 섭섭함을 느꼈고 운명을 원망마저 하고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못 가진 나에게 말이지요.


선택받은 작가 혹은 화가가 되지 못할 운명이지만 의무처럼 그림을 그린다면? 열정 없이 의무감으로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재능 없이도 애정만으로 그려도 되는 게 아닐까?


굳이 신의 선택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가도 화가도 되지 못하면 어때요. 글을 쓴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테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흔들려도 또 상관도 없습니다. 다시 돌아 제자리에서 '선 긋기'부터 하고 있을 저를 그려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 과정에서 '잘하고 싶다'는 단어만 지우면 아무런 제약도 없는. 자유로운 작업입니다. 운명 같은 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고통 창작 행위로써 그림이나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났다고 본다면요.


 돌아서 가도 됩니다. 친구가 잠깐 아프면 쉬었다 가도 됩니다.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고 함께일 테니까요. 외로울 때 말동무가 되어주는 글. 집중할 일이 필요할 때나 머리를 식혀야 할 때 곁을 지켜줄 그림이 있으니까요.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을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사랑의 생애> 이승우



깊은 호흡을 하며 생각 속으로 들어가 걸어봅니다. 거기서 사랑이 찾아왔다는 결론이 났다면 굳이 이런저런 고민은 군것질처럼 끊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냥, 하는 거죠. 군것질 같은 군소리는 서랍 깊숙이 넣어놓고요. 글과 그림이라는 사랑. 운명도 의무도 아닌 사랑으로. 저는 그저 그것만 하겠습니다. 질척이는 짝사랑이더라도요.


오늘도 그립니다. 그리고 쓰겠습니다.

수영을 책으로 배운다는 분도 있던데. 작가님들은 아실 거예요. 뭐든 책으로 배워야 하는 이 마음요. 자~ 그림도 책으로 배워보자고요. '그림 그리고 싶다. 학원은 부담스럽다.' 해서 책을 제법 사놨습니다. 하나씩(너무 묵혀서 이미 너무 쉬운 책이 된 것도 있습니다만)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간단한 펜 스케치와 초간단 수채화 작업 그림입니다.

이 책의 특징은 수채와 마카 그리고 색연필을 맛보기로 연습해 볼 수 있다는 걸 거예요. 저는 마카 부분도 색연필 부분도 다 수채로 처리했습니다. 수채가 급하기 때문에... 이번 책은 좀 빨리 끝내기 위해서 11일 치 한 번에 올립니다. 가볍게 스쳐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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