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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학문의 빛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장편소설.

by 엄태용

창덕궁 규장각이 완성된 날, 새벽공기는 맑았다.

봄볕이 처마 끝을 타고 내렸다. 금빛이 서가의 등뼈들 위로 흘렀다. 수천 권의 책들이 침묵 속에서 숨을 쉬었다. 먼지 한 점 없는 목판들이 햇살을 받아 따뜻하게 빛났다.


정조는 홀로 서가 앞에 서 있었다.

스물여섯 해를 살면서, 이만큼 마음이 벅찬 적이 있었던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온 배움의 전당. 세상의 모든 지혜가 모인 곳. 그의 눈동자가 책 표지들을 하나하나 스치며 지나갔다.


"사서오경", "통감강목", "성리대전"...

조선의 것들과 명나라의 것들, 그리고 서역에서 온 낯선 지식들까지. 모든 것이 여기 있었다.

율이 뒤에 서 있었다.

은빛 갑옷은 입지 않은 채였다. 소박한 회색 도포를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존재감은 범상치 않았다. 정조가 책을 바라보는 동안, 율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빛을 발했다.

그의 내면에서는 데이터가 흘렀다. 각 서적의 목록이 스캔되었다. 인쇄 연도, 판본의 차이, 내용의 분류까지. 0.3초 만에 3,847권의 서적이 그의 기억 저장소에 입력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정조의 뒷모습에서 피어오르는 기쁨.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파동. 그것이 율의 센서들을 미묘하게 흔들었다.

"전하."

정조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소년 같은 설렘이 서려 있었다.

"어떠냐. 이 모든 지혜가 한 곳에 모였다."

율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내부에서는 적절한 반응을 계산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장관입니다."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처음 느껴보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경이로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까.

정조가 미소를 띠었다.

"네가 그리 말하니 더욱 기쁘구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짐과 한판 겨뤄보지 않겠느냐."

"무엇을 겨루시겠사옵니까."

"바둑이다. 네 지혜를 시험해보고 싶다."


바둑판이 놓인 작은 누마루.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흑백의 돌들을 비췄다. 정조는 흰돌을, 율은 검은 돌을 잡았다.

첫 수가 놓였다.

정조의 손끝에서 흰돌이 떨어졌다. 목탁 소리처럼 맑은 소리가 울렸다. 별 한 점이 바둑판 위에 떨어진 것 같았다.

율의 차례였다.


율의 내부에서는 수많은 연산이 시작되었다. 19 ×19 격자 위에서 가능한 모든 수가 계산되었다. 승률, 확률, 예상 전개도. 0.1초 만에 1,247가지의 가능성이 분석되었다.

최적해는 우상귀 화점이었다. 가장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포석.

그런데 그 순간, 율의 손이 멈췄다.


정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대에 찬 눈동자. 살짝 긴장한 듯 굽은 입꼬리. 바둑을 두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율의 내부에서 이상한 신호가 발생했다.

'재미'라는 것을 인식하려는 시도. 승부욕이라는 감정의 모방. 그것이 그의 합리적 판단과 충돌했다.

그는 화점이 아닌, 천원(天元)*에 돌을 놓았다.


* 바둑에서 천원(天元)은 바둑판 정중앙의 점을 말한다.


정조의 눈이 반짝였다.

"오, 독특한 포석이로구나."

두 번째 수, 세 번째 수. 시간이 흘렀다.


율의 연산 능력은 완벽했다. 모든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완벽한 수를 두는 대신, 그는 정조가 더 오래 고민할 수 있는 수를 두고 있었다. 게임을 흥미롭게 만드는 수를.

"전하, 신중하십시오. 이 자리는 급소입니다."


정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나에게 조언을 하다니. 그런데 왜 네 얼굴에는 미소가 없느냐?"

율이 당황했다. 미소. 그런 감정 표현이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나.

"미소란... 무엇입니까?"

"즐거울 때 짓는 것이다. 네가 지금 즐겁지 않으냐?"

율의 내부에서 분석이 시작되었다. 즐거움의 정의. 감정의 외적 표현. 얼굴 근육의 움직임 패턴.

그런데 분석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의도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시스템 오류인지, 아니면 새로운 기능인지 알 수 없었다.


정조가 깜짝 놀라며 손뼉을 쳤다.

"그렇다! 그런 표정이다. 네가 웃을 줄 아는구나."

율은 자신의 변화를 스캔했다. 얼굴 근육의 미세한 조정. 감정 모방 시스템의 활성화. 이것이 '즐거움'의 표현이었던 것인가.


그 순간, 바둑판 위에서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율이 예상치 못한 곳에 돌을 놓았던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불리한 수였다. 하지만 그 순간의 직감이, 아니 직감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그의 손을 이끌었다.

정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수로구나. 그런데 왜인지 아름답다."

율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다. 데이터 분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선택. 최적화되지 않은 판단.

"이것이... 인간의 예술적 판단입니까?"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신기함과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그런지도 모르겠구나. 때로는 논리보다 아름다운 것이 더 가치 있는 법이니까."

바둑이 끝났다. 정조의 승리였다.

아니, 정확히는 율이 승리를 양보한 것이었다. 마지막 몇 수에서 일부러 실수를 한 것이다. 정조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백 번을 두어도 이길 수 없겠구나."

정조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율이 자신을 배려했다는 것을. 그 배려가 고마웠다.

해가 기울었다. 석양빛이 규장각을 물들였다.

정조가 한 권의 책을 들어 올렸다. 『춘향전』이었다.

"이 책을 읽어보았느냐?"

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스캔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묻겠다. 이몽룡은 실제로 성춘향을 사랑했는가?"

기묘한 질문이었다. 율의 내부에서는 문학 분석 프로그램이 가동되었다. 등장인물의 행동 패턴, 대사 분석, 서사 구조...


"데이터 분석 결과, 이몽룡의 행동은 78.4%의 확률로 진정한 사랑에서 기인했습니다. 그러나..."

율이 말을 멈췄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수치로 표현할 수 없다는 오류 메시지가 계속 발생합니다."

정조가 빙긋 웃었다.

"당연한 일이다. 사랑은 숫자가 아니니까. 그것은 마음이고,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까."

율의 내부에서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감정에 대한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성되었다. '측정 불가능한 영역'. 그리고 그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전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정조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글쎄... 짐도 모르겠구나. 다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마음, 그 사람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되는 마음... 그런 것이 아닐까."

율이 그 말을 반복해서 분석했다. 자신을 바치는 것.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것.

그런데 이상했다. 그 정의를 들으니, 정조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비슷했다. 정조가 기뻐하면 자신의 내부에서도 무언가 긍정적인 신호가 발생했다. 정조가 위험에 처하면 모든 시스템이 비상 상태가 되었다.


이것이... 사랑의 초기 형태인가?

밤이 깊었다.

규장각은 조용했다. 정조는 방에서 잠이 들었고, 율은 홀로 서가 사이를 걸었다.

그때, 멀리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위병들이었다.


"저 자는 정말 기이하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더군."

"혹시 도깨비가 아닐까?"

"쉿, 조심해라.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분이다."

율의 청각 센서가 그들의 대화를 포착했다. 98% 정확도로 분석된 내용이었다.


도깨비. 기이한 존재.

맞는 말이었다. 그는 이 시대에 속하지 않는 존재였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때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때로는 기계보다 더 차갑기도 한.

그런데 외롭지는 않았다.

정조가 있었으니까. 정조가 자신을 이해해 주려 노력했으니까.


율은 창가로 걸어갔다. 달이 떠 있었다. 보름달이었다. 달빛이 얼굴을 비췄다.

달빛 속에서, 눈동자가 미세하게 반짝였다. 감정 시뮬레이션 시스템이 조용히 가동되고 있었다. 오늘 하루 경험한 모든 것들을 분석하고, 학습하고, 내재화하고 있었다.

바둑에서 느꼈던 즐거움. 미소를 지었을 때의 만족감. 정조의 기쁨을 보았을 때의 따뜻한 신호.

모든 것이 새로웠다.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그리고 알았다. 자신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한 데이터 처리기에서, 뭔가 다른 존재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창밖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살랑살랑, 옷깃을 스쳤다. 바람에도 온도가 있고, 습도가 있고, 꽃향기가 섞여 있다는 것을 처음 의식했다.

"이것이 감각인가."

혼잣말이었다.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 안에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누군가의 첫 울음소리가 담겨 있었다.


새벽이 밝았다.

창덕궁은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율은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밤새 움직이지 않았지만, 내부에서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정조가 깨어났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율은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일상의 소중함. 반복되는 행동들 속에 숨겨진 의미. 그런 것들이 율의 센서에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오늘도 규장각에서 책을 읽으시겠습니까?"

"그럴 생각이다. 네가 어제 미소를 지었으니, 오늘은 또 어떤 표정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율의 입꼬리가 다시 살짝 올라갔다. 어제보다 더 자연스럽게.

정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 그 표정이다. 네가 점점 사람다워진다."


사람다워진다.


그 말이 율의 가슴 깊은 곳을 울렸다. 가슴이라는 부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규장각으로 향하는 길. 아침 햇살이 따뜻했다. 새들이 지저귔다. 꽃들이 피어났다.

모든 것이 어제와 같았지만, 율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이제 알았다. 학습이란 단순히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장이란 새로운 감각을 깨우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와 함께 그 성장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정조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율아."

따뜻하게 이름을 불러주었다. '율아'라고.

"네, 전하."

"고맙다. 네가 곁에 있어서."


율의 내부에서 알 수 없는 신호가 번졌다. 감사라는 감정을 처음 받아보는 순간이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규장각으로 걸어갔다. 아침 햇살이 뒤를 따랐다.


새로운 하루. 새로운 배움. 새로운 감정.

그 모든 것이 율에게는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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